서른살 여름 | 런던맑음
차가 우측통행인 한국에선
길을 건널 때 왼쪽을 봐야 하고
차가 좌측통행인 런던에선
길을 건널 때 오른쪽을 봐야 한다.
처음에 헷갈렸다가 몇 번 큰일 날 뻔
하지만, 가장 좋은 건 양쪽 모두 보는 거겠지?
차도에서나 인도에서나
우리의 인생 그 어디에서나.
런던 한복판 Oxford Street를 걷다 스타벅스를 들어갔다. 한국에서처럼 커피를 시키는데 갑자기 바리스타가 이름을 묻는 거다. 응? 내 이름을 왜 묻지? 잘못 들었나 싶어 순간 당황했지만, 놀라지 않은 척 다시 되물었다.
“Sorry?”
어색하게 멀뚱멀뚱 서있는 폼이 딱 봐도 런던 초보인 나에게, 착해보이는 갈색머리 바리스타 아가씨가 여전히 미소 띤 얼굴로 다시 물어봐주었다.
“What’s your name?”
처음 보는 여자가 다짜고짜 내 이름을 묻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영국에서!
이 아가씨는 동양인 남자가 신기한 걸까?
동양인의 이름이 궁금한 건가?
아님… 내가 마음에 들었나?!
이름을 대답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으로 스쳐가는 수 만 가지 추측들.
연락처라도 알려줄 걸 그랬나?
이따 커피 받으면서 말해줄까?
뭐, 거의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가던 찰나, 흐뭇한 상상이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What’s your name?”
그 아가씨가 다음 손님에게도 똑같이 이름을 묻는 게 아닌가! 그러더니 (아깐 정신이 팔려 미처 못 봤지만) 이름을 쓱쓱- 컵에다 적고선 옆으로 넘기더라. 그리곤 다시 아무렇지 않게 주문을 받고, 다시 이름을 묻고, 다시 컵에다 적고... 그러다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Kyu, here is your latte~”
우렁찬 목소리로 내 이름이 불리고, 하얀 종이컵 위에 또렷하게 'Kyu'라는 글자가 적힌 커피가 나왔다. 그제서야 흩어져있던 퍼즐을 맞춘 듯, 이 모든 사건들이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아... 여기선 주문번호 대신에 이름을 불러주는구나
그래서 주문할 때 이름을 물어본 거구나
이 당연한 일이 내 맘을 들었다 놨다 한 거구나...
덕분에 짧은 순간이나마 행복했다. 조금 쪽팔리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근데 신기한 건, 내 이름이 적힌 이 커피가 뭔가 남다르게 느껴진다는 거다. 갑자기 커피에 대한 주인의식이 생겼다 할까?
이게 바로 내가 주문한, 내 이름이 적힌, 내 커피이구나.
다른 사람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자기 이름이 적힌 컵을 아무 데나 놔두거나 버리기는 웬만큼 낯 두껍지 않은 이상 쉽진 않을 것 같다. 그저 번호 대신 이름을 컵에 적었을 뿐인데 참 많은 게 달라진듯한 기분이 들었다.
또렷이 내 이름이 적힌 컵을 두 손으로 감싸안고, 부드러운 우유거품으로 가득한 라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입에서부터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모든 게 아직 낯설기만 한 런던에서 처음으로 갖게 된 내 것의 느낌. 내 이름이 적힌 내 커피였다.
그래, 그럴 수만 있다면
내 삶에도 내 이름을 큼직하게 적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