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n일차
더디지만 몸에 기운이 생겨나고, 움직임이 조금 빨라졌다. 그러나 몸에 꽂혀있는 링거바늘과 피주머니가 여전히 움직임에 제한을 두게 했고 짜증을 유발했다.(특히 팔을 잘못 놀리다 바늘이 순간 깊숙이 파고들어 갈 때 그 찌릿함 & 불쾌함...)
하루의 시작을 공복혈당 검사로 맞이하는 게 익숙해졌다. 소변줄을 제거하고 나서는 직접 소변을 본 후 소변통에 소변을 담아야 했는데 이 일도 점점 능숙해졌다.
전신마취로 인해 찌그러진 폐를 펴기 위한 3단 호흡기 운동과 걷기 운동도 새로운 습관으로 자리 잡아 굳이 애쓰지 않아도 몸이 자동으로 움직였다.
역시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야. 단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뿐이지. 결국 모든 건 적응하게 돼있어.
그런 의미에서 어느새 병실과 복도, 화장실까지 나의 공간이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곳에서 약간의 안락함과 편안함마저 느꼈다. 이 또한 적응의 결과겠지.
하지만 내 몸만은 드럽게 적응이 안 되는 군.
통증이 줄어들어 괜찮다 싶다가도 "힝, 속았지~?" 하며 날 놀려댄 얄미운 통증..
그치만 괜찮아. 나에겐 천하무적 마약성 진통제가 있으니까. 곧장 버튼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크~ 이 나른함. 머리가 멍해지면서 한 순간 바보가 된 것 같은, 달콤하면서 기분 나쁜 기분.
내 피부도 고작 이 버튼 하나로 잠시나마 깨끗해지면 얼마나 좋을까?
수술 이후 불규칙해진 수면시간과 항생제 복용 및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복합 작용한 결과로 건선은 역대 최악으로 심해져 있었다. 등이 가렵고 배가 가렵고(배가 제일 참기 어려웠음) 다리가 가려워도 마음껏 긁을 수 없고, 뱀의 허물처럼(직접 만져본 적은 없지만) 건조하고 바삭한 껍질들이 전신 피부에서 벗겨지고 있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하.. 심란하다. 췌장도 췌장이지만 이 미쳐 날뛰는 건선은 언제쯤 회복이 되려나... 과연 피부과에서 처방해 주는 광선치료와 연고 바르기로 나아질 수 있을까? 수술도 한 마당에 퇴원하고 곧바로 피부 치료를 받는 건 괜찮은 것일까?
여러모로 피곤한 현실 속에 놓여있었지만 그럼에도 난 지치지 않았다. 밥시간이 되면 꼬박꼬박 챙겨 먹고 배가 부르면 곧장 일어나 걸었다. 공 올리기 운동(3단 호흡기 운동)도 게을리하지 않아 결국에는 공을 3개까지 들어 올리게 되었다.(유경험자는 알겠지만 공 3개 들어 올리는 건 나름 칭찬받을만한 일이다)
살면서 이만큼 살기 위해 노력해 본 적이 있던가?
단언컨대 한 번도 없다. 오히려 죽고 싶어 안달 난 적이 더 많다면 모를까.
난 이상하게도 이 기회를 놓치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 삶이라는 절호의 기회말이다.
누군가 "다시 태어나면 뭐가 되고 싶어?"라고 물으면 난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안 태어나고 싶다고 대답하곤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내게 답변을 바꿀 기회를 주면 어디 깊은 산속에 있는 천년바위로 태어나겠다고 대충 대답했다. 나로선 죽고 나서 다시 태어난다는 명제 자체가 거짓이기에 대답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다. 다음 생이라는 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 그 비스무리한 상황이 펼쳐졌다.
왠지 수술실에서 깊은 잠을 자고 나면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내가 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했다.
그동안은 용기가 없고 비겁해서 해내지 못한 일들, 그러니까 날 갉아먹던 나쁜 기억들과 단단하게 굳어져버린 상처들을 마치 썩은 종양을 도려내 쓰레기통에 쳐 갖다 버리듯 당장에 갖다 버리는, 그 어렵고도 힘든 일을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 결연한 다짐을 수행하기 위해 그 좁은 병실 안 내 침대에서 부단히 노력했다. 종종 오래 길들여진 버릇들이(우울, 불안, 분노 등등) 튀어나와 날 무력화시키려 들 때면 몸을 일으켜 복도로 나가 걸었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었으며, 공 올리기 운동을 했다.
그리고 퇴원 후의 내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가족과 친구들, 직장 동료들에게 좀 더 다정히 대하고 친절하게 굴며 많이 베풀고 사랑을 표현하는 새로운 내 모습.
정말 상상대로 이루어질까?
이 날도 다행히 혈당 수치가 정상으로 나왔다.
나의 행복한 상상이 점차 현실이 되고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