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차 췌장암 환자입니다.

자가활동질환

by 다정오

2022년 12월.


양방향척추내시경수술로 튀어나온 요추 4-5번 디스크 덩어리를 제거해 허리는 더 이상 아프지 않았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온몸이 탈수된 것처럼 힘 없이 축 늘어졌고, 마음은 그보다 더 심각하게 너덜너덜했다.


여전히 적응 안 되는 무겁고 먹먹한 다리.

이 사실을 실감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조금도 걷고 싶지 않았다. 침대에서 내려와 발을 바닥에 대는 것조차 싫어 화장실 갈 때 빼곤 침대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그래도 살려면 걸어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회복하려면 어떻게든 하루에 8000보는 걸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말씀을 도저히 무시할 수 내 하루 일과는 집 근처 공원을 1시간 정도 걷는 걸로 겨우 우 끝이 났다.


걷기 운동을 하러 가던 어느 날이 생각난다. 당시 뉴진스의 디토라는 노래가 인기여서 상점 이곳저곳에서 들려왔고 길가엔 유독 내 또래로 보이는 연인들과 친구들이 다정히 오갔다. 그들은 마치 뮤직비디오 주인공들처럼 달콤한 멜로디에 맞춰 밝은 표정과 자연스러운 몸짓, 그 어떤 한계도 없을 것 같은 자유분방함을 풍기며 내 옆을 스쳐는데 그걸 보며 든 생각, 이 세상은 진짜 불공평하구나.. 였다.

자칫 튀어나온 보도블록에 무뎌진 발이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걷는 내내 노심초사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그들은 지극히 평범하게 그 나이에 맞는 일상을 보내는 것 같았고, 행복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내가 영원히 잃어버린 것들을 충분히 가진 것 같았.

세상은 불공평한 게 확실했다.


나무토막처럼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영화를 보는 것과 책을 읽는 것이 전부였다.

우선 그동안 날 지긋지긋하게 괴롭혀온 허리에 대해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른 책, 정선근의 백 년 허리.


페이지를 넘길수록 후회가 밀려왔다. 내가 왜 이걸 이제야 알았을까. 허리에 나쁜 자세, 행동, 습관 등등. 책에 구구절절 나와있는 나쁜 얘기들은 거의 대부분 내 얘기였다.


그렇게 후회와 깨달음을 반복하며 책을 읽다가 흥미로운 문장 하나를 맞닥트렸다.


'자가활동질환'


자신의 면역기능이 스스로의 몸을 공격하는 병을 자가면역질환이라 부르듯, 자신의 활동으로 자기 몸을 공격해서 생기는 요통은 자가활동질환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내 몸의 움직임이 내 허리를 공격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요통을 치료하는 중요한 열쇠이며, 그것이 바로 척추위생이다.​

-정선근, 백 년 허리 중에서-


이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너무나 익숙한 이름이 보였기 때문에.

오랜 시간 건선이라는 지독한 자가면역질환을 앓아왔던 나였기에 내가 이걸로도 모자라 자가활동질환까지 스스로 얻었단 생각이 들어 머리가 쿵했다.


위에 설명되었듯이 자가면역질환이든 자가활동질환이든 둘 다 내가 나 자신을 공격하는 병이라고 한다.

내가 나를 공격한다라.. 참으로 멍청하고 이해 안 되는 상황인 듯 하지만 놀랍게도 이는 실재한다. 내가 앓는 병들이 정확히 어떤 메커니즘으로 발병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나를 싫어하고 수치스러워하며 작은 잘못 하나도 엄격하게 혼을 내며 살아왔던 건 사실이다. 이것이 나 자신을 공격하는 것에 해당한다면 내가 건선에 걸리고 암에 걸리고 허리디스크 수술까지 받은 건 내가 나를 죽도로 미워한 탓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책을 다 읽고서 핸드폰 메모장 앱을 켜고 글을 썼다.

거창하게 새해 다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냥 이 순간의 감정과 깨우침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던 것 같다.


'새해에는 나를 공격하지 않기. 나를 사랑하기. 나를 용서하기.'


그렇게 춥고도 힘겨웠던 한 해가 지나고 새해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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