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의 맛>을 본 후
야한영화일기를 쓰기로 마음먹고 나서 처음 쓰는 영화를 무엇으로 할 지 고민했습니다. 그러나 굳이 처음이란 상징성에 얽매이기보다는 생각나는 대로 가장 최근까지 제 머리에 남아있는 영화를 다루기로 했습니다. 바로 연애의 맛입니다. 벌써 제목부터 자극적인 게 어지간히 영화 좀 봤다 싶은 분들이면 금세 주파수가 맞춰질 만합니다. 맛있다는 것은 무언가를 먹었을 때, 나오는 어휘입니다. 제일 먼저 저는 '먹다'란 어휘가 갖고 있는 뜻을 점검해 봅니다. 여러 가지 뜻이 있는데, 15번이 유달리 눈에 거슬렸습니다.
성적(性的) 대상으로 삼아 정조를 빼앗다. 비속한 말임.
우리가 slang으로 아는 먹다 혹은 맛있다의 표현을 역시 흔히 아는 사랑에 접목시키면 비속한 뜻이 됩니다. 이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사랑의 뜻을 찾아 봐야 합니다. 잠시 사전을 보고 오겠습니다. 1번부터 우리가 아는 그 "사랑"의 뜻이 나오네요?
이성(異性)의 상대에게 성적(性的)으로 이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의 상태. 드물게, 좋아하는 상대를 가리키기도 함. 애정.
먹다와 사랑 사이에 공통적인 게 하나 나옵니다. 상대를 성적(性的)으로 바라본다는 것! 시작은 같지만, 열렬히 좋아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러야 우리는 그 형태를 사랑이라고 부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대를 대상화하는지의 여부가 사랑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요소입니다. 간혹 가다 사랑을 착각하는 이들에게 이 두 가지의 사전적 의미를 보여 주면 반박하지 못하고 버로우 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사랑은 이처럼 쉬운 듯 해 보여도 여러 가지 조건을 만족시켜야 합니다. 오죽하면 미스터 선샤인의 고애신이 처음에는 LOVE가 쉽다고 했지만, 나중 되니 생각보다 어렵다고 했을라고요? 자 이제 맛과 사랑에 대한 정의를 어느 정도 내린 우리가 다음 단계로 고민해야 될 것은 연애의 정의입니다. 이을 련(連), 사랑 애(愛) 두 한자어로 구성된 연애란 단어는 글자 그대로만 보면 충분히 이해하기 쉬울 수 있지만, 저는 사전을 중시하는 사람인지라 연애의 뜻도 찾아 보렵니다.
서로 이성으로서 사랑하는 관계를 이룸. 때로, 동성 간(同性間)의 성적(性的)인 사랑을 가리킬 때도 있음.
연애와 사랑의 뜻을 비교하다가 또 흥미로운 점을 발견했습니다. 동성 간의 성적인 사랑도 연애로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이란 뜻에는 처음부터 이성의 상대에게 이끌린다고 하니 이 부분에 대해서 생각할 여지를 제공합니다. 사랑, 연애는 정말로 어렵습니다. 그런 어려운 단어를 전면에 내세워 영화 제목으로 띄웠으니 좀 더 감독의 고민이 반영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듭니다. 제가 아쉬움이라고 표현한 것은 제목을 자극과 흥미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는 티가 역력히 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자기소개서를 써 주면서 아이들에게 하는 말이 있습니다. 너희들이 쉽게 쓰는 단어들을 쉽게 생각하지 마라. 그 단어들은 절대로 쉬운 뜻이 아니다. 열정, 창의, 배려, 혁신 등등. 그 단어의 뜻을 한 번이라도 숙고하고 음미하는 자세를 가져야 글을 쓸 때 좀 더 논리적이고 신중하게 쓸 수 있다고 말해 줍니다. 취준생들보다 더 어른일 텐데 그 감독님의 스탠스가 아쉽습니다. 물론 감독님의 의중이 십분 반영된 것은 아니겠죠? 소위 말해 영화 투자사들의 입김이 들어갔을 지도 모릅니다. 어찌 보든 저찌 보든 이 제목 설정부터 관객을 바보로 안 겁니다.
내용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내용을 아우르는 제목에도 고민이 적은데, 내용에도 깊은 고민이 들어가 있을까 생각했고, 유감스럽게도 내용마저 실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나름대로 영상 예술을 하시는 분들인데 표현이 너무 직관적입니다. 예상이 가능한 인물 구도나 전개 등은 이런 실망감을 뒷받침해 주는 요소들입니다. 산부인과 의사인데 산모와 아이를 지키지 못한 트라우마로 여자를 멀리하는 남자 의사, 아버지의 대를 이어 비뇨기과 의사가 되었지만 집안을 등한시하는 아버지 때문에 남자를 기본적으로 좋게 보지 않는 여자 의사. 연애는 기본적으로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메워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작위적이에요. 저도 자기소개서를 쓸 때, 아이들에게 언제나 강조하는 것이 있습니다. 한정된 글자 수란 틀 안에 기승전결을 갖춰 놓아 보시는 분들이 충분히 고개를 끄덕이게 해야 한다는 것인데요. 여기서는 두 남녀가 한 아파트에 사는 것으로 인연의 당위성을 불어 넣습니다. 우리가 흔히 연애의 로망 중 하나로 이웃집 남녀가 있기는 하지만, 정말 희박한 확률이고 실제로 그걸 영화를 통해서 접한다면 쉽사리 공감하기 어렵다는 것이 제 사견입니다.
19금답게 관객의 오감을 자극하는 씬도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씬들이 왜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걸 스크린을 통해 설명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4번 정도 나옵니다. 노출의 주체는 여자 조연 배우입니다. 처음 씬은 여자 주인공이 이사 온지 얼마 되지 않은 날에 이뤄집니다. 여자 주인공의 옆집에서 거사가 행해지죠. 그런데 제가 야동이 아닌 야한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뜬금없이 베드씬이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맥락과 배우의 감정선을 따라 가며 베드씬까지 이어지는 게 좋은 거거든요. 그런 기준에서 봤을 때, 특히 첫 번째 씬 (대략 11분쯤)의 "갑툭튀"는 대체 왜 나온 것인지 의구심을 품게 만들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의구심은 지워지지 않습니다.
첫 영화다 보니 애정을 갖고 한 땀 한 땀 써 내려가 보았습니다. 야한 영화 일기답게 같은 19금이라도 잔인한 영화나 무서운 영화의 리뷰는 올리지 않을 셈입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야 자! 밤 야(夜)와 들 야(野)! 야생 혹은 날것, 인간 본연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행동들은 대개 밤에 이루어진다. 이런 메시지를 다시 한번 되새기면서 영화를 마칩니다. 아, 참고로 여기 나오는 씬들은 이상하게 밤에 이뤄지는 경우는 한 번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해가 안 되었던 건지도 모르겠어요.
다음 영화도 정했습니다. 김수현, 설리 주연의 <리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