톱니바퀴처럼 맞아 떨어졌던 계획이 어그러지기 시작한다
내 말이 맞잖아. 얘기를 가만 들어보면 재능을 타고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질 않아. 그러니까 일단 톱니바퀴가 어긋나기 시작하면 고치기가 어렵지.
오쿠다 히데오 <공중그네> 中
<야한 영화 일기>는 야하면서 평단의 혹평을 받았던 영화를 제 시선에서 다시 다뤄 보려고 합니다. 몇 줄의 글만으로 이 영화 쓰레기다! 라고 욕하기 전에 영화를 차분히 회상하면서 감독의 의도도 이해해 보고, 마음으로 영화를 다시 봅니다. 저도 사람이기 때문에 영화를 찬찬히 보기 힘듭니다. 철 지난 영화들이 대다수라 인터넷으로 보다가 건너뛰기를 시전하기도 한다는 점, 양해 바랍니다. 그래서 리뷰가 기존의 리뷰어들처럼 좀 차분하진 않고 제 미장센을 리뷰에 잔뜩 집어넣는다는 것도 리뷰를 시작하기 전에 안내 말씀 드립니다.
김수현과 설리가 주연한 희대의 걸작(?) 리얼을 리뷰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많은 분들도 느끼셨겠지만 그 충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습니다. 이 영화는 야한 영화 일기 기준에서 보면 엄청나게 강렬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야한 장면이 뇌리에 박힐 정도로 강렬하진 않거든요. 그러나 아이돌 출신인 설리가 배우로써 처음 영화에 도전했단 상징성도 있고, 그 상대가 톱스타인 김수현이라는 사실까지 더해져서 영화에 대한 관심도가 상당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난 후, 든 생각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영화를 제작한 이들은 국내에서의 악평이 중요하지 않구나 라는 것입니다. 내수 시장에서 수익을 거두겠다는 생각 자체를 별로 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대신 중국에서의 수익 도모를 노린 것으로 판단됩니다. (일부 장면에서 중국 무술을 빙자한 화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그것을 미장센이라고 포장할 지 모르지만 말입니다.)
이 영화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진짜와 가짜의 대결을 골자로 하고 있습니다. 가짜 김수현은 진짜의 삶을 보고 모방하며 진짜와 흡사해지려고 합니다. 여기서 문제는 가짜가 진짜를 탐내면서 발생합니다. 재활치료사로 나오는 설리가 처음에는 진짜를 사랑합니다. 그러나 추후에 가짜와 묘한 러브 라인을 형성하게 됩니다. 가짜 김수현은 슬프게도 설리와 정신적 교감만 합니다. 그가 바랐던 것은 그것 이상이었을 텐데 정말 한스럽지 않았을까 그에게 감정 이입을 해 보게 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짜는 진짜에 비해 훨씬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이 영화에서 느껴졌습니다. 당연하죠? 진짜의 삶을 욕심내는 그에게 진짜의 0부터 100까지 어느 것 하나 가지고자 했을 겁니다. 하지만 영화에서 그려지는 그 과정은 상당히 개연성이 없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영화 속 대사 하나하나도 제 고개를 끄덕이게 할 만한 리얼함은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설리가 김수현에게 물어봅니다. "시에스타, 왜 시에스타란 이름을 지었어?" 그러니 김수현이 말합니다. "그냥." 설리가 말합니다. "카지노에서 잃게 되던 따게 되던 다 낮잠 같은 근사한 이유를 댈 줄 알았어." 김수현이 그러니 굉장히 느끼하게 맞받아 칩니다. "근사한 건 바로 내 앞에 있지." (우웩...) 장면에서도 뜬금없이 사람을 패거나 죽이는 장면도 등장하고, 러시아 무희들이 춤을 추는 장면은 야한 장면을 많이 본 저마저도 야하다기보다는 거북스럽다는 인상을 주는 등 영화 내부에서 보여지는 총체적 문제는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영화 내용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박스오피스 관객 수마저 언리얼이었습니다. 한국 말고 대만에서의 관객 수 말이죠. 영화의 재정적 결과를 고스란히 책임지는 것은 투자사입니다. 그러나 그 영화가 주홍글씨처럼 박혀 고통받는 것은 영화를 찍은 배우, 감독, 스태프 등입니다. 하나하나가 지금까지도 지워지지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놀림거리로 회자되는 것만 보더라도 리얼이란 영화가 지향했던 것은 리얼이지만, 그것은 결국 언리얼, 즉 환상이었던 셈입니다. 감독이 영화 개봉 당시 관객들의 혹평에 내놓은 항변은 자기 철학이라기보다는 궤변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김수현은 이 영화를 마지막으로 도망치듯 군대로 떠납니다. 그도 자신의 최후를 알고 있었던 걸까요? 개인적으로 사고치고 입대한 것보다 훨씬 이해되는 선택이었습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린 김수현을 본 적이 있거든요. 엔터 비즈니스의 특성상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숨어 있을 겁니다. 김수현이 작품 보는 안목이 후루꾸도 아니고 말이죠. 탄탄한 연기력으로 많은 팬을 확보한 그였으니까.
시대가 바뀌어서 언리얼과 리얼의 대결을 다룬 드라마나 영화가 많아졌습니다. 특히 최근에 애정하며 보고 있는 드라마 중, <너도 인간이니?>는 언리얼과 리얼 사이의 관계 변화, 언리얼(로봇)이 리얼을 대체하는 과정, 리얼이 언리얼을 질투하는 모습, 둘 사이의 대조 등 분명히 우리 현실에서 접하기 힘든 것들인데 왠지 모르게 그것들이 설득력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대조가 너무 극명해서 로봇임에도 불구하고 언리얼에 빠져들게 만드는 건 있습니다. 그리고 1인2역을 연기하는 서강준의 연기력 때문에 약간의 비현실이 가려지는 것도 있겠죠? 하지만 그렇다고 김수현이 서강준보다 연기를 못하나? 그렇진 않잖아요. 결국 재료가 같더라도 그 재료를 더 맛있게 만드는 요리사, 감독과 시나리오가 향방을 가르는 게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지만 또 생각해 보면 우리 사회에서는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 해 봤을 언리얼한 상황들이 눈앞에 벌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워졌습니다. 잔인무도한 살인, 입이 떡 벌어지는 규모의 사기 등이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것들을 보면 과연 우리가 알고 있는 언리얼이 진짜로 언리얼인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고전 소설 <옹고집전>에서도 보면 잠깐이었고, 진짜 옹고집을 혼내 주기 위한 의도도 있었지만 가짜가 진짜를 쫓아내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까? 영화 리얼을 보면서 리얼은 무슨, 언리얼하다고 비아냥대기 보다는 내가 사는 이 세상, 아니 가까이는 내 주변을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를 돌아봅니다.
나는 과연 다른 이에게 리얼한 모습으로 비춰질까?
언리얼한 모습으로 비춰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