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환상 속에서 나올 때, 나는 한 단계 더 진화한다
자유 의지란 단연코 환상이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 스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사고와 의도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의식적으로 통제할 수도 없는 배경 원인으로부터 발생한다. 우리는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자유를 가지고 있지 않다.
샘 해리스 <자유 의지는 없다> 中
나는 예능을 참 좋아한다. 예능이야말로 진정으로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대표적 콘텐츠입니다. 물론 드라마도 현실과 환상을 헷갈려 하면서 악역에게 쌍욕을 한다거나 결말이 자신이 바라는 대로 안 이뤄지면 드라마 홈페이지에 가서 압박을 넣는 것도 비일비재하다. 그러나 드라마는 종영되는 순간 현실로 돌아온다. 약간의 후유증은 있지만, 시청자들은 그세 새로 하는 드라마에 다시 마음을 빼앗긴다. 외국처럼 시즌제 드라마가 활성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드라마는 한 번 종영되면 시청자의 가슴에 남을 뿐이다. 하지만 예능은 어떤가? 얼마 전까지 우리를 울고 웃겼던 무한도전만 해도 10년 넘게 매주 토요일마다 시청자를 만났다. 리얼 버라이어티란 타이틀을 걸고 하던 프로인 만큼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줄타기하며 시청자들의 삶 속에 무한도전을 새겼다.
TV만 그런 게 아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또 하나의 녀석은 SNS다. 심지어 TV 프로들도 영상 짤로 SNS에서 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수치화할 수 없지만, 이것이 TV 프로그램들을 존재하게 하는 이유기도 하다. SNS는 이것 말고도 존재 이유가 다분하다. 나와 같은 사람들도 SNS가 필요하다. SNS를 통해 나의 글을 보여 주고, 그 글이 사람들에게 반응을 얻는 게 좋다. 그것이 또 나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그런데 그 힘은 자세히 보면 허상이다. 그것이 실질적으로 나에게 금전적 가치를 준다거나 사회적 지위를 안겨 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그냥 도화지 위에 내가 그린 그림일 뿐이다. 아무 것도 없는 내가 그린 그림이 지금 입장에서 얻는 사람들의 소소한 칭찬은 공허함을 준다. 결국, 이것도 환상이다.
그런데 이 환상이 현실을 잡아 먹기도 한다. 지금 나도 종로에서 강의를 끝마쳤지만, 바로 움직이지 않고 이렇게 그 자리에 앉아 글을 쓰고 있다. 가로수길에서 저녁부터 강의가 있는데 꼭 이 글을 다 써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틀 동안 소위 말해 호캉스를 가 방송과 글을 모두 스톱하는데, 이 기간 동안 내가 SNS에 글을 올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하루라도 글을 안 쓰면 입에 가시가 돋을 것만 같이 습관이 되어 버린 이 삶, 이것 역시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가상의 공간인 SNS에 풀어내는 나의 환상이 만들어 낸 허상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이 환상을 좇는 걸 멈추고 싶지 않다. 작은 인정이라도 너무 기쁘기 때문이다.
오늘 어머니와 오랜만에 점심을 먹었다. 어머니가 물었다. 정말로, 왜 퇴사했느냐고. 사실 정말 솔직한 이유가 있었다. 회사에서 약간 곤란한 일에 놓였었다. 사실 내가 조금만 견디면 충분히 아무 일 없이 넘어갈 만한 사안이었다. 그러나 나는 오래 전부터 회사에 큰 미련이 없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퇴사라는 중차대한 결정을 그리 어렵지 않게 해 버렸다. 그 이유를 여기다가 구구절절히 쓰기는 어렵지만, 누구든 들으면 멋없어 보이는 이유다. 그런 멋없는 실상을 밝히지 않고, 글쓰기와 방송에 대한 나의 애정을 먼저 입에 올렸다. 물론 그 애정이 내가 사표를 쓰게 만든 동인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 동인은 환상이다. 실질적인 멋없는 이유보다 후순위다. 그렇지만 어머니에게 좀 더 멋있어 보이고 싶은 마음에 거짓말을 했다. 이 거짓말이 100% 순수한 거짓은 아니지만 거짓말 한 것은 맞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결국 환상을 좇는 나의 허세가 만들어 낸 핑계다. 그 자리에서는 진실을 고하지 못해 어머니에게 죄송하다.
지금 저의 퇴사 결정도 환상을 좇는 게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듭니다. 하반기 시즌이 시작되었고, 조바심 내서는 안 되지만 결과가 어떨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머니가 너의 수입이 현재 불안정하지 않냐고 말했고, 나는 회사원으로 사는 것으로는 절대 부자가 될 수 없다고 말했지만, 보여진 게 없는 저로서는 그 말에 힘을 싣지 못했습니다. 결국 제 환상이 환상에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분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다행히 제 글 실력을 인정해 주시는 분들이 하나 둘씩 나오고, 그 분들이 조금씩 저를 찾으면서 굉장히 느리지만 계속 걷고 있습니다. 환상 속에서 계속 머무르는 것도 아직 차가운 현실에 몸을 담갔다가는 꼼짝없이 얼어죽을 제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