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후회하지 않을 뿐
그런데 우리들의 삶 또한 그 어린아이의 슬픔만큼이나 빨리 저녁빛 속으로 지워져버리는 것은 아닐까?
파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中
퇴사한 지 4달이 지났다. 4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너무나도 빠르게 나의 일상에서 이전의 회사는 지워졌다. 회사에 있으면서 조직에 순응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다. 그런 회사를 나오고 나의 기억 속에서 회사는 사라졌다. 회사에서는 내가 모셔야 할 윗사람들이 참 많았다. 그리고 (나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상무님께서 나에게 참 잘 대해 주셨다. 물론 그 분 앞에서 예의는 지켰다. 이 곳에서 만나는 윗사람들은 (상무님 포함) 누구든 나보다 나이가 많은 어른이다. 유교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장유유서'라고 나이 많은 이들을 깍듯이 모시라고 가르친다. 나도 그런 가르침을 받은 1人으로서 그런 어른들을 공경했다. 그 분들이 보이는 모습이 초지일관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른에게는 일정 이상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공경했고 어려워했다. 그 분들이 '편하게 있어'라고 했지만 그 말이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조직 생활이 맞지 않는 옷이긴 했지만, 명색이 2년간 군 생활도 거치며 더욱 불합리한 꼴을 많이 봐 왔는데 이 정도쯤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래도 그 곳에선 군대보다 1년 정도 더 버텼다. 하지만 나에게 평생을 책임져 줄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래서 나왔다.
싸가지가 없더라도 일만 잘 한다면 그 곳은 살 만하다. 회사에서 잘 나간다는 사람들을 보면 모두에게 호평받지는 않는다. 그런데 회사 내에서 결국 나의 임탈권을 쥐고 있는 건 상사다. 간혹 팀장님들이 우리에게 리더십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물론 이건 나만의 판단이니 사실과 다를 수는 있다.)회사란 것이 비용을 적게 들이면서 매출이 많이 나야 하지 않은가? 팀장이면 자신이 맡는 팀, 팀원이면 내가 맡는 고객사가 매출이 팡팡 터져야 한다. 내가 영업팀에만 있었다 보니 이 관점에서만 말하지만 회사는 수익을 내야 하는 곳이니까 어떤 회사원이든 이 잣대에서 바라봐야 하고, 평가받아야 한다.
일 잘 하면 장땡.
요샌 워낙 이직이 보편화되어 있다 보니 전 직장에서도 다른 직장으로 옮기는 사람들을 체크한다고 한다. 혹시나 회사를 험담하지는 않는지 말이다. 뭐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입사 전에 개인 SNS 계정까지 들여다 봐서 문제가 되는 회사가 있다는 소식도 심심치 않게 들린다. 오죽하면 블라인드라는 직장인 익명 소셜 앱이 나와 그 안에서 직장인들이 자기 회사를 그렇게 씹지 않는가? 여자친구도 은행에서 IT회사로 옮겼는데 옮길 당시 잡플래닛에서 평점 3.5 이상 되는 회사만 지원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보통 그 곳에다가 회사에 대한 품평을 남기는 것은 회사를 씹기 위해서라고 말하는데 너무나도 이해가 되었다. 그 와중에 평점이 그 정도만 되어도 되게 좋은 회사라고 설명해 주는데 내 여자 친구가 그렇게 똑똑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가 아무리 회사를 나와 자유의 몸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나의 행적을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들을 빨리 잊었노라 말하고 다니지만 그들은 나를 금방 잊지는 못하겠구나 라고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게다가 지금 내가 쓰는 글이 '퇴사일기'다 보니 회사에서의 삶과 회사를 나와서의 삶을 비교/대조하며 글을 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회사를 절대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 곳에서 나는 여러 가지를 배웠고, 좋은 사람들을 만났고(그 사람들도 나를 좋게 기억해 줄지는 모르겠지만), 비즈니스에 대해 배웠다. 절대 그 시간이 허송세월이 아니었고 그 경험을 기반으로 지금의 형태, 일종의 1인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생각해 보니 나 역시도 잊으려고 하지만 잊지 못하는 것 같다. 퇴사일기를 쓸 때만큼은 기억 저편에 숨어 있던 경험까지 끄집어 내 글감으로 빚어야 하니까 말이다.
오늘 본격적으로 하반기가 기지개를 켰다. KT 그룹 전 계열사가 사람을 뽑고 있고, LG화학도 수줍게 채용공고를 냈다. 나처럼 누군가 회사를 나오면 누군가는 들어가야 하는 것이 숙명이다. 그리고 들어간 회사에서 인정 받고 승승장구할 수도 있고, 나처럼 회사를 나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떤 형태로 그대들의 미래가 펼쳐지던 모든 경험들은 소중하다. 월급을 받기 위해, 남들 다 가니까 등 이런 이유로 취업 준비하지 않고 자신들의 자아를 위해, 더 멋진 미래를 위해 큰 물에서 놀아 본다는 포부를 갖고 취업 준비를 하기 바란다. 지금의 나도 LG 서브원이 있었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누군가 묻습니다. 다시 회사를 갈 생각이 있냐고요? 최근에 회사에 다시 입사할 수도 있는 길을 찾았습니다. 사외 이사입니다. 스타가 되어서 회사에서 제발 우리 회사에 와 달라고 사정하지 않는 한, 다시 회사에는 들어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회사를 위해서도, 나를 위해서도, 더 크게 보면 국가 경제를 위해서도 훨씬 더 효율적인 일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글을 쓰고 여러분들을 만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