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의 잔향은 오래도록 남아 있다
"이상해. 그 모든 게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나는 자리에 앉은 채로 몸을 돌려 다시 그녀를 마주보았다.
"그래. 정말 이상해. 그 시절이 지나가 버렸다는 게 믿기지 않아."
"정말 이상해. 이제 와선 그런 게 전혀 상관없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여전히 상관이 있는 걸."
가즈오 이시구로 <나를 보내지마> 中
상관없는 건 없다. 상관없다고 억지로 생각하고 외면하는 것일 뿐 실제로는 그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것'이 여전히 나의 신경을 쓰이게 만든다. 일단 그것이 내 레이더 망에 들어왔다면 말이다. 지금의 나에게 그게 뭐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회사원이었던 기간이었다. 회사를 다니던 기간이 부지불식간에 지나가 버렸다고 생각하지만 그 기간이 나에게 가르쳐 줬던 의미들은 여전히 나의 기억 속에 남아서 내가 다음 스텝을 밟을 때, 음으로 양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 회사를 다니기 전에도 조직 생활을 간간이 하면서 커 왔다. 군대도 그랬고, 학교도 그랬다. 그러나 회사는 또 다르다. 이전의 조직과 회사의 가장 큰 차이는 그 조직에 있으면서 내가 매달 25일마다 월급을 받는다는 것이었다. 내가 아무리 깽판을 쳐도, 일을 못해도, 욕을 먹어도 25일마다 어김없이 월급이 통장에 꽂혔다. (물론 대출과 카드값으로 그 월급은 바람에 스치우듯 나를 지나갔지만 말이다.)
회사 다닐 때만 해도 정말 지우고 싶었던 기억이었다. 마음이 잘 맞는 선배도 있었지만, 내 의사도 제대로 묻지 않고(묻긴 했지만, 상사의 물음에 no라고 배포 있게 답변할 만한 사원이 어디 있을까? 게다가 그 당시에 나는 일도 못 하는 천덕꾸러기로 인식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비업무라도 잘 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있었다.) 자신과 동행시켰던 선배도 있었다. 내 잠재력을 의외로 인정해 줬던 팀장님도 있었지만, 나라면 지긋지긋해 하는 팀장급도 있었다. 좋은 기억과 나쁜 기억이 섞여 있지만 전반적으로 회사에서의 기억이 유쾌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회사에서의 기억을 잊기 위해 금요일만 되면 술을 그렇게 마셨던 것 같기도 하다. 짬이 어느 정도 쌓여도 회사에서의 긴장감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래서 퇴근만 하면 집에 누워서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그 다음 날이 오는 게 싫었다. 출근하는 게 즐거웠다면 나는 언제나 일어나서 휘파람을 불며 출근 준비를 했을 거다. 아마 대부분의 동료들이 나와 같이 회사 가기 싫은 마음은 여전히 품고 있을 거다.
회사를 나오고 나서 그 생활과 완전히 단절되었노라고 묻는다면, 나는 그렇지 못하다고 답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퇴사 후, 더욱 나는 다이어리를 끼고 살게 되었다. 매일 해야 할 일을 끊임없이 정리하고 지워 나간다. 회사에서도 항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심지어 회사에서는 To-do 가 시스템에 떠 있었다. 99+란 숫자가 자꾸 내 눈에 거슬렸다. 그러나 시스템 상에 떠 있는 일 외에도 하루에도 수십 통의 메일을 일일이 확인하며 내가 해야 할 일을 추려 내야 했다. 내가 손이 느리고 둔한 지라 스케줄러를 받아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고, 일을 쳐내기 바빴다. 그러다가 꼭 내가 놓치는 일들이 나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스케줄러를 써야겠다고 다짐하지만 '작심삼일'이었다.
거기서 하지 못한 체계적 스케줄링을 퇴사하고 나서 하게 되었다. 이전의 일에 비해 훨씬 많은 생각을 거쳐서 해내야 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매일 해야 하는 일의 양은 훨씬 줄어들었다. 그리고 바쁘게 출근하는 삶이 아니다 보니 집 문을 나서는 순간 work 모드가 켜질 수 있었다. 무조건 스케줄링부터 하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처럼 매일 브런치 글을 쓰다 보니 그 글을 일단 먼저 쓰고 스케줄링을 하기도 하고, 스케줄링을 먼저 쫙 하고 글 작업을 시작하기도 한다. 그래도 회사를 다니면서 스케줄링의 중요성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시도했기 때문에 지금의 내가 스케줄링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이것만 보더라도 회사가 나에게 준 영향은 크다.
며칠 전에도 친하게 지내던 선배와 통화했다. 그 선배, 회사 다니기 싫다면서 여전히 다닌다. 내가 멋지다고 생각했던 선배다. 집이 여유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 나가서 할 게 없다며 볼멘소리를 하기는 하지만 분명히 생각하는 인생의 그림이 있을 거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는 추가 근무를 하면서까지 끝낸다. 업무 시간에는 (노는 것 같아 보여도) 업무에만 집중한다. 공과 사를 구별한다. 언제나 칼퇴한다. 회식은 중요한 거 아니면 참가하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이 멋져 보였다. 그 선배와의 통화는 언제나 즐겁다. 그 선배도 내가 회사 사람이 아니어서 그런가 신나게 나와 떠들었다.
동기들 중에서도 나와 최근까지 같은 팀이었던 동기와 제일 친하다. 인사팀에 갔다. 이제 막 적응 중이라고 하지만 나와 대척점에 서서 열심히 회사에서 일하는 인재이기 때문에 그 곳에서도 잘 해내리라 믿는다. 농담삼아 내가 잘 하고 있는지 인사팀을 대표해서 보겠다고 한다. 퇴사일기를 쓰는 나이지만, 절대로 회사가 싫어서 나간 게 아니다. 회사와 내가 맞지 않는 것뿐이지. 보시다시피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남지 않았는가? 누군가는 말한다. 회사에서의 인간 관계는 회사에서 끝내야 한다고. 웃긴 영상 중에서도 퇴근하고서도 카톡을 보내 나를 괴롭게 하는 상사와 같은 영상들이 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회사도 결국 사람 사는 동네다. 일은 언제든지 바뀔 수 있지만, 사람의 잔상은 계속 남는다. 회사를 버티지 못하고 일찍 관뒀지만 그 곳에서 소중한 사람들을 건졌다. 그 관계의 힘으로 내 인생의 커리어는 계속 이어나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