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했기 때문에 캐치할 수 있던 찰나의 순간
대체로 그럴 나이였다. 뭔가를 준비하거나 준비한 것에서 실패하고 다시 시도할 나이. 뭔가를 끊임없이 채우려 하지만 채워진 것 없는 나이.
편혜영 <선의 법칙>
47살. 박진영은 JYP를 시가총액 1조 기업으로 만들면서 아이가 생겼음을 공개했다. 그의 나이는 47살이었다. 그저께 고깃집에서 만난 서버 분의 나이도 47살이었다. 선선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서 흠칫 놀랄 만한 내공을 느꼈다. 아이가 자랑스럽게 엄마의 직업이 작가라고 말할 정도로 입지가 있어 뵈는 분이었다. 작가로서의 삶이 궁금했지만, 그 궁금함을 전부 해소할 수 없는 공간에서 저희는 처음 만난 만큼 후일의 인연을 기약하며 고깃집을 나섰다. 그 작가님(서버님 혹은 선생님)의 나이는 47살이었다. 현재 잘 나가는 한국 여성 작가님들의 나이도 47살이었다. 1972년, 그 때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그 때 태어난 분들이 여지없이 나의 마음을 휘어잡았을지 궁금했다. 그렇게 나는 이틀의 시간을 보냈고 이제서야 글로 그 분과의 만남을 기억하려 한다. 부디 이 기억이 나에게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지고, 그 인연이 또 다른 영감을 줄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시작해 보고자 한다.
창고43, 삼성역 부근에 있는 고깃집을 갔다. 큰 맘 먹고 한우를 파는 고깃집에 갔다. 게다가 대기업에서 운영하는 프랜차이즈의 깔끔함을 자랑하는 BHC에서 운영하는 한우집을 간다. (기업 자기소개서를 쓰는 게 업이니 만큼 기업의 흐름 보는 게 취미다) 자리를 기다리는데 회사에서 회식을 하러 왔는지 190만원과 20만원으로 나눠서 카드 결제를 해 달라는 부장님의 말이 들린다.
우오, 여기는 포쓰가 이만저만이 아니구나.
조금은 긴장된 상태로 자리에 앉았다. 한우를 조지러 왔던 우리였던 만큼 쫄지 말자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우리는 고기를 구워 주기를 바랐다. 이왕이면 프로페셔널이 구워 주는 고기가 더 맛있지 않겠는가? 서버 분이 고기를 구워 주시기에 우리는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 일을 한 지 한 달 되었고, 태어나서 처음 이런 일을 했다고 하니 조금은 불안했다. 하지만 고기 한 점 한 점에 열의를 갖고 구우시는 모습에 이내 안심했다. 그리고는 그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셨다. 첫 마디가 내 귓가를 확 사로잡았다.
작가에요.
그 순간 저도 모르고 "저도 글을 써요!" 라고 하면서 재잘재잘 대화를 이어갔다. 글을 쓰던 분이 갑자기 고기 굽는 일을 하게 된 연유가 궁금했다. 괴리감 때문이었다고 한다. 책을 통해 표현하던 일상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이 더 타자를 칠 수 없게 만들었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자신은 에세이 작가이고, 가상의 이야기를 풀어 내는 소설가들이 부럽다고 했다. 나는 그런 작가님이 부러웠다. 글이 써지지 않아 과감하게 틀을 깨는 활동을 하시는 모습에서 경이로움까지 느꼈다. 솔직히 고백하면 처음에 나는 그 분에게 주제 넘게 나의 경험담을 말했다. 으레 가로수길에서 글쓰기 살롱을 할 때 수강생 분을 만나듯 상담을 이어갔다. 일단 쓰시고, 일단 공개해라! 독자들의 피드백이 작가님의 글을 살찌운다고 다리 한쪽을 올린 채로 열변을 토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느낌인데, 유명한 작가님 같아.
명성이 실력을 좌우하는 건 아니다. 허나 나도 대화를 곱씹어 보니 느껴지는 풍모가 보통이 아니었다. 문득 내가 실례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오신 그 분께 사과의 뜻을 전하니 그 분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그럴 수 있다고, 젊을 때는 더 설쳐야 한다고 이런 말을 하신다. 별 말이 아닌데도 왠지 모르게 위안이 되고 더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그 뒤에 몇 번 오면서 그 분이 했던 말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그 분의 말을 잊지 못해 가슴 뛰었다. 또 그 분의 글을 읽고 싶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관계'란 것에 대해 선생님이 갖고 있던 생각이었다. 고기를 구우며 수많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데, 그 사람의 인생이 나에게 들어오는 것은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 거라고 한다. 우주와 우주가 만나 하나로 합쳐지는 과정은 신기하다. 나이가 들더라도 그 새로움은 계속 경험하고 싶을 것 같다. 그 분도, 나도 그런 새로움에 대한 설렘 때문에 글을 쓰고 사람 만나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나 보다.
선생님도 저와의 만남이 좋았던지 번호를 받아 가셨다. 연락을 주신다고 해 기다리고 있다. 카카오톡 추천친구에 뜬 것을 보고 우리 둘 다 뛸 듯이 기뻤다. 성미가 급했던 우리는 그 분의 명함 속 이름으로 구글링까지 하며 그 분이 쓰신 에세이가 있나 뒤져 보았지만, 애석하게도 찾지 못했다. 대신 이런 글을 하나 찾았다.
분명히 이 분의 실명 대신 다른 필명이 작가계에서 핫한 네임일 거라고 상상해 보며 이 분의 연락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다. 내 좁은 글세계가 이 만남을 통해 망망대해처럼 깊고 넓어지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