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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하리 Sep 21. 2018

추석, 수확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전 회사의 매각을 바라보며 3탄

그러나 나는 어쨌든 살아야 했다. 우박이 쏟아지든 산사태가 일어나든 밥 짓고 빨래하고 살아갈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나는 삶 외부에서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닌 나의 하루를 모셔야 했다. 나에게 닥친 우연에 저항하지 말고 운명을 회피하지 말고 삶의 요청을 수용하기로 했다.


은유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中


바야흐로 추석 연휴 직전 평일이다. 추석 하면 가장 먼저 사람들이 떠오르는 연관 어휘가 추수이다. 농경 국가 시절 1년 내내 정성을 들여 기른 농작물을 거두는 게 추석 시즌이다. 도시인들은 수확은 없지만, 그리운 고향에 내려가 가족을 만나 힐링의 시간을 보낸다. 수확이라기보다는 매일 있는 생산 활동의 와중에 잠시 주어지는 쉼표의 시간이다. 누구에게든 추석은 기뻐야 정상이다. 자기소개서 오픈카톡방 외에도 현직자방을 운영하는데, 그 방에서도 조기퇴근하네 마네로 방에서 회사에 대한 불만을 토로 중이다. 소소하지만(참치나 햄이라도) 선물도 받고 의미 있는 추석들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도, 이전 회사의 사람들에게도 올 추석은 기쁘지 않다.


올 추석에 나는 집에 가지 않는다. 이유는 뻔하지 않겠는가? 아버지가 나의 퇴사 사실을 진작부터 알고 있다가 몇 주 전 문자로 얘기를 꺼냈다. '퇴사해서 BJ를 하는구나'로 시작하는 문자다. 당연히 이후 내용은 굳이 여기서 주저리 주저리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거라 본다. 부자 간의 연을 끊자는 식의 강경한 내용이다. 정말 죄송한데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고 내 일을 했다. 2-3주 전에는 한창 몰려 오는 자기소개서를 처리하기에 바쁜 와중이었다. 마지막에는 다시는 연락하지 말자는 내용이었다. 그 후, 다음 날 바로 문자가 또 온다. KB국민은행은 자소서를 쓰는 게 어떻겠냐는 내용이었다. 나는 강경하게 차단을 했다. 내가 멋지게 성공한 모습을 보여 드리는 것이 효라 생각했고, 내 판단이 맞다고 확신했기 때문에 그 확신을 결과로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상황에서 아버지와의 갈등 및 입씨름은 나의 에너지를 소진하는 격이다. 다만 차단을 하면서 조금 씁쓸했던 것은 그 순간 김병만의 인터뷰가 생각났기 때문이다.

성공하고 나니 아버지는 이미 없었다

는 얘기가 퍼뜩 생각났다. 그런데 우리 둘의 의견 차이가 이번에 반짝이었다면 모르겠지만, 너무 해묵은 갈등이다. 이거는 실제로 겪어 보지 않은 이들이면 함부로 얘기해서는 안 된다. 혹자는 차단은 심하지 않냐고 할 수 있겠지만, 나는 자소서 혹은 글이란 분야로 성공하고 싶고, 지금 이 쪽에 에너지를 올인해도 모자랄 판에 무언가에 의해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부모와 갈등이 있고 내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누군가가 이 글을 보면 아마 공감하지 않을까 본다. 그래서 나는 추석 때 집에 가지 않는다.




이전 회사를 다닐 때(작년) 돌이켜 보면 상무님의 권한으로 이 때쯤 되면 모두 퇴근했다. 조기 퇴근하면서 올 추석 때는 뭐할지 서로 두런두런 얘기 나눴다. 올해엔 그런 게 없을 거다. 회사가 팔릴 위기에 처했고(아니 사실상 확정), 고향에 가서 편안함을 즐기기엔 마음이 여유롭지 못할 거다. 나와는 다를 거고, 나처럼 자의로 LG를 뗀 게 아니니까 부모가 그 분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은 다르겠지만 기본적으로 나를 바라보듯 걱정어린 시선으로 볼 수밖에 없다. 당연하지, 어른들은 내 자식이 LG 들어갔다고 좋아했는데 졸지에 중소기업 사원으로 신분이 떨어지게 생겼으니 말이다. MRO 시장 1위라고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지만, 냉정하게 말해서 MRO란 것이 뭔지도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아마존이나 그레인저 등 세계적 유통 회사 혹은 MRO 회사가 서브원 MRO사업부를 사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공허한 외침일 뿐이다. 중소기업 적합업종 이슈가 터졌을 때, 진작에 삼성은 갖고 있던 아이마켓코리아를 내놓았고 그 당시에도 외국의 주요 MRO 회사들이 물망에 올랐지만 인터파크가 샀다. 그게 현실인 거다. LG란 따뜻한 둥지에서 쫓겨난 이상 냉엄한 시장의 평가가 기다릴 뿐이다. 어떤 평가든 받아들일 수 없다고 외쳐 봤자 일개 직원들의 외침이다. 서브원에 다니지 않는 일반 사람들의 눈에는 그게 그거인데 뭐 저렇게 난리냐 그나마 관대한 시선을 가진 분들은 LG가 아니네 불쌍하다.. 이 정도다.


서브원이 본사로 있는 마곡 근처의 영어학원이 붐빈다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을 거 같다. 이제는 실전이다. LG 간판이 사라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추석 때, 수확의 기쁨 혹은 휴식의 시간을 누릴 마음의 여유가 이제 구성원들에게는 없다. 사람들 보면 이제야 나의 계발을 시작하면 과연 될까? 하며 주저하고 두려워하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 그들에게 이 노래를 선물로 주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사실 방금 글을 쓰며 우연히 랜덤재생으로 걸린 노래인데 이 글을 보는 분들도 같이 들으면 좋을 것 같다. 윤종신의 "Slow start"다. 지금의 death valley가 계속될 리 만무하다. 그 작은 희망을 품고 올 추석에는 모두가 좀 더 행복하길 바란다. 나는 추석 때에도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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