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거기에 있단 것만으로도

존재론적 고찰을 하게 만드는 것들

by 하리하리

'인생 역전'도 좋지만.

'인생 여전함'이야말로 소중한 것이라고,

여전히 건강하고, 여전히 일할 수 있고,

여전히 먹을 수있고, 여전히 음악을 듣고

여전히 저녁을 맞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행복임을

시간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고.


송정림_<감동의 습관> 中



날이 갈수록 인간을 대체하는 것들이 늘어가고 있다. 누군가는 말했다(사실 이 글을 쓰던 혼술집 친한 형이 아까 넌지시 말해 준 얘기다. 여기엔 쓸 생각이 없었는데, 이 주제의 글을 쓰다 보니 묘하게 인용이 된다). 인간보다 복잡한 존재는 아직까지 없다고. 그런데 이 형이 말한 것은 감정에 국한되어 있다. 감정적으로는 아직까지 인간을 대체할 만한 존재는 꽤 오랫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인정한다. 하지만, 감정 외적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녀석들은 하루가 지날수록 늘어나고 있다. 조금 어렸을 때에는 기술의 발달이 단순 노동을 하는 인간의 자리를 위협한다는 것만 알고 있었다. 심지어는 인간이 인간과 마주하는 것에 감정적으로 지쳐 그 도피처로 반려동물을 찾는다. 인간 스스로가 기댈 언덕이 사라져 가고 있는 실정이다. 존재 가치가 위협받고 있는 인간, 어느 정도 위협받고 있는지? 이런 상황에 우리 인간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생각해 보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1. 리얼돌, 16년만에 수입 허용

이 판결을 통해 리얼돌의 수입이 허용된다면, 직접적으로 타결을 받는 쪽은 성을 상품으로 제공하는 이들이라고 생각한다. 안 그래도 성매매에 대한 윤리적 문제로 인해 전사회적 논의가 계속되고 있는 이 때, 리얼돌이 들어온다면 새로운 경쟁 주체, 그것도 인간이 아닌 이가 시장에 유입되는 모양새다. 우리는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게 있다. 첫째, 성행위는 인간만의 전유물인가? 성행위는 사랑을 표현하는 메시지 중 하나다. 그래서 혹자는 성행위를 '사랑을 나눈다'고 하지 않았는가? 몇 년 전, 나왔던 영화 HER에서 인공지능과 인간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이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는데, 인공지능보다는 덜 충격적이겠지만, 리얼돌이 인간의 역할을 대체한다면 우리는 사랑을 하는 데마저도 에너지를 쓰지 않을 거다. 그렇다면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인간은 꼭 사랑을 해야 하는가? 이에 대한 판단은 여러분의 몫으로 남겨 두겠다.


#2. 아무 것도 안 하는 남자를 빌려 드립니다.

이 내용을 처음 접하고 나서도 리얼돌 못지않은 충격을 안겨 줬다. 이것 역시 인간의 존재론적 근원에 대한 의문을 던지는 행보라고 봤기 때문이다. 특히 나는 수많은 취준생들을 만나는 일을 하면서 '아무 것도 안 하는 인간'은 곧 죄악이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들을 보면 정말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삶을 살아 왔고, 그 삶의 흔적을 또 다른 열정적 미래의 엔진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일하면서 봐 왔던 인간의 모습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아무 것도 안 하는 이'를 가만히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굳이 뭔가를 해야 하나? 앞에서 언급한 성행위 혹은 사랑을 안 해도 인간으로서 가치 있는 거다. 아니, 더 나아가 그냥 아무 것도 안 해도 인간은 태어난 것만으로도 칭찬받아 마땅하다. 지금의 사회가 너무 흉흉해 모두가 경쟁 중이고, 그 경쟁의 칼날에서 승리하지 못한 99%의 이들이 겪는 소외감의 크기는 짐작조차 어렵다. 하지만, 그 패배감으로 인해 나라는 사람의 존재마저 부정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그게 아니었을까? 동생의 죽음으로 인해 이와 같은 (다소 무기력해 보이는) 선택을 하게 된 그에게 조롱보다는 따뜻한 격려가 필요하고, 우리의 마음 속에도 이 분과 같은 선택을 하고 싶어하는 욕구가 감춰져 있다고 본다. 사실 나도 틈만 나면 다 놓고 저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엔 아직은 나를 바라보는 취준생 친구들이 많아 그럴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기술이 지금보다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전해도 인간은 그 때에도 지금 내가 이렇게 혼술집에 앉아 있듯 각자의 자리에 있을 거다. 내가 그 때 없더라도 나의 후손, 나와 닮은 누군가가 그 자리에 있겠지. 그러니까 우리 모두 우리의 소중함을 절대로 잊지 말고,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만으로도 기특한 거다. 뭔가 역할을 하지 않아도 된다. 그리고 현재까지 우리가 해 왔던,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역할을 빼앗기더라도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의 생존 방식을 찾을 거라 믿는다. 그러지 않았다면 우리의 역사는 지금의 모습을 띠지 않았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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