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스터디에서 생각지도 않게 마주한 나의 '금기'
이번 주말부터 동화스터디를 시작했다. 사실 이 스터디에 오기 전, 동화란 장르가 갖고 있는 몽글몽글함에 매료되어 홀리듯 신청했다. 거기에 덧붙여 나 스스로에 대한 생존 고민도 함께 있었다. 언제까지 기업에 지원하는 이들의 자기소개서만 써 줄수는 없으니까. 재미없는 산업 분석 레포트만 쓰면서 나의 감성을 허비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이 두 가지 이유가 나를 이 곳으로 이끌었다.
그런데 스터디장님께서 미리 보고 오라고 했던 영화부터 심장을 쿵하게 만들었다. 바로 영화 분홍신이었다. 2005년작으로 혹시 영화를 볼 생각이 없으신 분들은 바로 아래 링크를 보면 좋을 것 같다. 공포영화에 잔혹 동화다. 스토리북만 봐도 등골이 오싹해 보는 걸 애초에 포기했다(리더님, 죄송합니다....).
내 기대/예상에 반하는 스터디 리더님의 첫 포문에 살짝 당황했다.
동화는 원래 잔혹했어요.
잊고 살았는데, 사실 동화도 결국 삶의 면모를 여러 상징에 투영하는 것일 뿐, 동화도 삶이다. 우리 삶? 사실 모두 불행다. 물론 마음은 아닐 수 있지만, 얼굴 표정에 그리고 입에 올리는 단어들에 불행함과 고단함이 묻어나 있다. 슬프다. 그런 잔혹한 현실을 종결짓지 못하고, 계속 살아가야 한다는 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뾰족하게 찾지 못한 채 살아가야 한다는 게 얼마나 슬프고 그 자체로 잔혹한 일인가?
(잔혹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 1회차라 정확히 방향을 예측하기 어려운)동화스터디, 오늘 그 첫 화에서 리더님이 화두에 올린 주제는 '금기'다. 누구나 마음 속에 금기 하나쯤은 다 품고 산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 금기는 오래 전부터 많은 어른들을 거쳐 나에게까지 내려 온 무의식의 결과물이다. 그 금기를 동화스터디답게 상징적 단어로 대체한다. 바로 이거다.
지하 맨 끝 작은 방
제 구독자(취준생들이 대다수라 이런 주제를 올려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러분들에게도 금기 하나쯤은 있지 않은가? 제 브런치의 금기라 할 것 같으면, 자소서 샘플만 올려야 할 것 같다 정도겠다. 하지만, 이 곳은 내가 나의 글을 쓰는 공간이기에 오랜만에 그 금기를 즈려밟아 보려 한다)들과도 공유해 보고 싶어 스터디 중간에 리더님이 내 주신 과제를 가져와 봤다.
내 '지하 맨 끝 작은 방'에는 '메시아 증후군'이라는 녀석이 살고 있다. 메시아 증후군, 누군가를 도와주는 데에서 쾌감을 느끼지만, 알고 보면 그렇게 누군가를 도와주는 자기 스스로를 보며 만족감을 느끼는 것, 이게 바로 메시아 증후군이다. 사실 이 증후군의 명칭을 알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미움받는 용기'라는 책을 통해서다. 구절이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은데, 이것도 병이라면서 이 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라고 주인공은 말한다.
금기에 대해 다루고 있는 작품 중 내가 인상 깊게 봤던 책이 하나 더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다. 주인공 조르바가 철저히 사회적 금기에 자신을 가두고 있는 다른 주인공(이름이 뭐였드라...?)을 변화시키는 게 주된 내용이다. 그 책 속에도 무수한 금기가 나오지만, 조르바는 소위 말해 개무시를 한다. 그가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어쩌면 유일무이하게 믿는 것)은 나 자신이다. 자신의 마음이 내켜하지 않으면 금기 따위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회를 살아가야 하는 건 맞지만, 그렇다고 내 자신의 마음의 소리까지 철저히 외면하면서 이 사회를 살아갈 필요는 없다. 나도 경험적으로 돌이켜 보면 내 마음의 소리(a.k.a 내적 욕구)가 사회적 금기와 충돌했던 적이 많다.
별로 독서를 좋아하지도 않는 내가 얼마 안 읽은 몇 권의 책 중 그나마 내세울 수 있는 두 권에서 얘기하는 주제가 나와 신나서 몇 마디 떠들어 봤다. 다시 나의 금기로 돌아가 보겠다.
메시아 증후군.
아는 분들은 알겠지만, 나는 자기소개서를 써 주는 일을 하고 있다. 의뢰인들의 '마음의 소리'를 듣고, 그 소리를 이쁘게 정리해서 완벽하게 다른 글로 탈바꿈시켜 준다. 그 결과물을 받아 든 이들의 반응은 거의 호평 일색이다. 나에게는 자소서를 써 주면서 버는 돈도 돈이지만, 그 호평이 듣고 싶어서 이 일을 시작한 것도 있다. (내 룸메이트도 나를 움직이는 게 명예 같다고 했다. 인정.) 왜 이렇게 나는 사람들의 인정이 받고 싶을까? 그 이면에는 내가 꺼내기 쉬우면서도 어색해 하는 아버지와의 관계가 있다. 이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나의 금기, 아니 더 나아가 나라는 사람을 설명하는 게 애초에 불가능하다.
아버지는 나를 언제나 물가에 내놓은 새끼오리로 여겼다. 물론 내가 일상생활을 할 때, 다른 이들보다 손도 서툴고, 일을 깔끔하게 종결짓는 것에도 어려움을 호소한다. 언제나 부모님의 쿠사리를 먹었다. 자, 그런데 생각해 보자. 그게 아예 잘못된 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어렸을 때만 해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나를 굉장히 꾸짖으셨다. 그리고 항상 당신이 하시면서 잔소리를 하셨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그렇다고 내가 구제불능의 인간도 아니었다.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소리도 들었고, 촉망받는 아이이기도 했다. 충분히 칭찬 받을 수 있는 여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비난/비판을 받았다.
어느 정도 머리가 크고 나서, 내가 사회에서 1인분 몫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서부터는 아버지가 잔소리를 하면 그대로 맞받아쳤다. 어렸을 때만 해도 그것이 잘못인 줄만 알았지만, 이제는 아니란 걸 안다. 그러나 한창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에 받은 계속된 비판으로 자존감이 상했던 것이 사실이다. 상처를 보듬어 줄 나만의 후시딘을 찾아야 했다. 나는 그 연고를 외부에서 찾았다.
나는 아버지와 1년 반째 연락을 하지 않고 지내고 있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제 이쯤하면 되지 않았냐고 말한다. 그러나 이들의 얘기도 일종의 선입견이고, 금기이다. 나는 아버지와 마주했을 때의 어색한 공기를 잘 알고 있기에 웬만하면 그 자리를 마주하고 싶지 않다. 어머니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나는 지금도 매우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혼자서) 잘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 다니던 시절, 오산에서만 1년 가량 있다가 본사로 옮겼을 때가 기억난다. 오산에서 출장다닐 때, 나는 틈만 나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를 묻고, 우리 사이가 꽤 돈독했다. 그러다 보니 본사로 가서 집에서 출/퇴근을 하기 전, 꽤나 기대했다. 애석하게도 그 기대는 1주일 만에 깨져 버렸다. 그 기대감이 무너져 버리고 나서 딱 네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안 되겠다.
단 몇 줄 만으로 말하기에는 나의 괴로움이 크기에 그만 말하려고 한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다 자신만의 금기가 있다. 그 금기를 꺼내 놓는 것이 리더님 말씀처럼 어려운 사람도, 쉬운 사람도 있다. 나 같은 경우에 처음 꺼내놓는 것까지는 쉽지만, 그걸 계속 말하는 것은 어렵다. 그래서 이 글도 마무리 짓기가 생각보다 버겁다. 여기서 끝을 내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