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덕 아래 냇물, ‘소녀’의 노래, 그리고 잊히지 않는 밤
Chapter 10 – 별이 보이지 않던 밤
언제부터인가 봄과 가을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계절이 되어 있었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그 일주일이 내 인생의 기억 중 가장 또렷한 봄밤이 될 줄은.
새해가 지나고, 현수의 첫 TF 파견이 끝날 무렵이었다.
당초 3개월 계획이었으나 진행 속도가 더뎠고, 원하는 결과물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우리 부장님, 아니 TF팀장님은 결국 결단을 내렸다.
“사장님 보고 전까지 일주일만 상근으로 가자.”
그리하여 팀은 회사 연수원 강의실을 빌려 특별 근무 체제에 돌입했다.
마침 신입사원 연수 시기와 겹쳐 강의실은 어렵지 않게 확보했지만, 숙소는 문제였다.
연수원 내 객실은 이미 신입사원들로 꽉 차 있었고, 결국 우리는 인근 모텔에 흩어져 너무는 우스운 상황이 되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겐 그 모든 게 좋았다.
처음 경험하는 TF 업무였고, 참여한 멤버들은 각 부서와 계열사에서 선발된 ‘에이스’들이었다. 나만이 팀장님 보조 역할이다 보니 유일하게 초짜…
그들 사이에서 나는 막 입사한 새내기 였지만,
매일 회의록을 정리하고 진행 상황을 보고하는 일에 몰두했다.
다른 부서와 계열사 사람들을 알게 되는 것은 큰 배움이었다.
특히 숙소 생활 덕분에 선배들과 훨씬 가까워졌다.
퇴근 후엔 숙소 앞 작은 감자탕집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소주 한잔 기울이는 게 일상이고 어느덧 형님이라고 호칭이 자연스레 바뀌어 있었다
그 자리엔 늘 웃음이 있었고, 때로는 업무 고민과 군대 이야기가 오갔다.
아직 군 입대를 앞둔 나로서는 그런 이야기가 재미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두렵기도 했다.
그렇게 매일 이어진 저녁자리 덕분에, 나는 부서의 ‘에이스 선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었다.
훗날 ‘1990년 TF 라인’으로 불리던 이 관계가 사회생활 전반에 큰 도움이 될 줄은, 그때는 몰랐다.
사장님 보고를 앞두고 팀은 마지막 리허설에 돌입했다.
각자 3개월 동안 고민하던 아이디어들이 모이자, 신기하게도 퍼즐이 맞춰지듯 새로운 방향이 만들어졌다.
서로의 경험과 시선이 더해지니 참신한 아이디어들이 쏟아졌다.
‘고인물은 썩는다’는 말의 반대가 바로 이 현장이었다.
그렇게 최종 리허설이 마무리되고, 우리는 작은 해산식을 가졌다.
연수원 안쪽 공원에 음료와 간식을 준비해, 그간의 노고를 나누는 조촐한 자리였다.
물론 음료라지만, 약간의 주류는 빠질 수 없었다.
분위기는 점점 무르익었고, 웃음소리가 밤공기에 섞였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가은이 낮은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언덕길 냇물에 발 담그러… 같이 갈래요?”
나는 잠시 머뭇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연수원 숙소 뒤편 언덕길을 따라가니, 오래된 나무 데크 아래 작은 쉼터가 있었다.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밤은 깊어졌고, 공기는 살짝 차가웠다.
가은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별… 잘 안 보이네요. 시골인데도.”
“그래도 공기는 좋잖아요. 마음이 깨끗해지는 기분이야.”
“…그치. 여기 오니까 딱 그 노래 생각나.”
“이문세?”
“응. 소녀.”
평소 가은이 좋아한다고 했던 그 노래였다.
둘은 자연스레 작게 허밍을 시작했다.
오직 두 사람의 목소리와 맑은 밤공기만이 그 자리를 채웠다.
노래가 끝나도, 한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가은은 고개를 돌려 현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빛 속에는 작은 미소와 떨림이 번졌다.
‘지금이라면 손을 잡아도 될까?
지금이라면 그녀의 마음도 나와 같을까?’
하지만 아무 말도, 아무 손짓도 하지 못했다.
밤은 그렇게 깊어졌고, 다음 날 아침, 그들은 아무 일 없었던 듯 회의에 참석했다.
그날 우리는 모두 짐을 챙겨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일주일 뒤, 사장님 보고는 성공적이었다.
팀의 성과는 인정받았고, 나는 입사 후 처음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그 밤의 이야기는 누구도 꺼내지 않았다.
가은도, 나도.
하지만 문득문득 그날의 장면이 떠오른다.
가은의 잔잔한 눈동자, 익살스러운 손짓, 그리고 그 순간 내 안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던 감정들.
그날 이후 나는 혼자 있을 때면 자주 그 노래를 흥얼거렸다.
“내 곁에만 머물러요, 떠나면 안 돼요…”
아직도 그 노래를 부를 때면,
그 언덕길의 공기와 그녀의 눈빛이 내 마음 한구석에서 다시 피어난다.
별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밤은 오래도록 내 안의 별빛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