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가에서 처음 손을 잡던 날, 그리고 입영 통지서.
제5장. 어른이 되어가는 계단
Chapter 11 – 바다로 가는 길
이제 우리의 공식적인 만남은 끝이 났다. 그러나 현수의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가은의 목소리가 잔잔히 남아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도, 그리고 가은에게도 이제는 서로에게 어울리는 새로운 계절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쯤은 더 다가가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수없이 전화를 들었다 놓았다. 망설이다 보면 기회를 잃는 법이라고 누군가 그랬다. 토요일 오후는 세상이 가장 들떠 있는 시간이었다. 직장인들이 일주일의 피로를 털고 자유를 즐기는 시간, 동시에 가장 약속이 많은 날이기도 했다. 괜히 전화를 걸었다가 ‘선약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어쩌나 망설이던 그는 결국 번호를 눌렀다.
“김가은 사원은 지금 자리에 없는데요. 식사 중이십니다.” 옆자리 동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현수는 괜히 안도했다. 거절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열 분쯤이 흘렀을까, 그는 다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홍보부 김가은 사원입니다.” 잠시의 정적이 흐르고, 현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 현수입니다.”
그는 지난 프로젝트 이야기를 꺼냈다. 곧 다가오는 여름휴가 얘기, 회사 사람들의 시시한 농담, 별것 아닌 일상들이 두 사람 사이의 거리로 흘러들었다. 가은은 조용히 웃었고, 그 웃음에 힘을 얻은 현수는 용기를 냈다.
“오늘 오후에… 커피 두 잔, 어때요?”
그 말은 그가 처음 가은을 만났던 날의 기억을 불러왔다. 같은 카페, 같은 자리, 그리고 그날 마주했던 커피 두 잔. 그는 그 추억을 농담처럼 꺼냈지만, 그녀는 잠시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순간 현수는 자신이 너무 앞서나갔나 싶어 머뭇거렸다.
그때, 가은이 말했다. “좋아요. 마침 약속이 취소됐어요.”
그 한마디에 현수의 마음이 환하게 밝아졌다. 햇살이 창문 유리에 부딪혀 번져나가고, 그 빛이 그의 가슴속에서도 퍼져나갔다. “현수 씨, 커피엔 설탕 안 넣죠?” “응, 그냥 써도 괜찮더라.” “그건, 쓸쓸한 맛이에요.” 가은의 말에 현수는 웃었다. 그 말 한마디가 그의 하루에 부드럽게 스며들었다. 그날의 대화는 짧았지만 잔상이 길었다. 직장 이야기와 선배들의 장난, 회식 자리의 소소한 에피소드들이 오갔고, 그 웃음소리 속에서 두 사람의 거리는 조금씩 좁아졌다.
며칠 후, 현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다음 주말에… 그냥 어디 좀 가고 싶은데, 같이 갈래요?”
“어디로요?”
“그냥, 기차 타고 아무 데나.”
가은은 잠시 생각하더니 미소를 지었다. “그럼, 바다로 가요.” 그 한마디는 여름 초입의 바람처럼 시원하고 설레었다. 그렇게 두 사람의 첫 여행이 정해졌다.
토요일 오후, 대구 고속버스 터미널. 현수는 가은보다 먼저 나와 있었다. 버스가 출발하자, 창밖의 풍경이 천천히 뒤로 흘러갔다. 가은은 창가에 기대어 웃었고, 현수는 그 웃음을 오래 바라보았다. 경포대에 도착했을 때, 바다는 아직 조용했다. 성수기를 앞둔 초여름의 바다, 흰 파도와 바람이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주었다. 바람이 불자 그녀는 노란 바람막이를 여몄다. 손끝이 닿는 순간, 그녀가 말했다.
“손이 왜 이렇게 차가워요?”
현수는 웃으며 되물었다. “그럼 계속 잡고 있어도 돼요? 따뜻해질 때까지.” 그녀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래요. 그게 오늘 하루의 목적이겠죠.” 하며 미소가 바람을 잠시 멈추고, 파도소리만이 그들의 대화를 덮었다.
저녁에는 바닷가의 허름한 식당에서 생선조림을 먹었다. 맛은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서로의 눈빛과 남겨진 소주 반 병의 온기만이 남았다. 밤바다를 걸으며 그들은 술기운을 식혔다. 모래 위에 남긴 발자국이 바람에 지워질 때마다, 그들의 마음도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작은방, 하얀 벽, 얇은 이불, 삐걱대는 침대.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누웠다. 무엇을 약속한 것도, 끝까지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했다. 그날 밤, 현수는 처음으로 ‘누군가와 같은 시간을 겪는다는 것’의 의미를 배웠다.
얼마 후, 입영 통지서가 도착했다. 현수는 담담히 가은에게 말했다. “나, 군대 가게 됐어.” 가은은 고개를 끄덕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침묵이 오히려 모든 것을 말해주는 듯했다.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은 말보다 침묵을 먼저 배운다고 했다.
첫 휴가 때의 짧은 만남, 그리고 한 통의 위문편지.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이었다. 시간이 흐르며 편지는 뜸해졌고, 그리움은 바람처럼 옅어졌다. 현수는 밤마다 훈련소 불빛 아래에서 가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 이름은 점점 희미해졌고, 그 희미함 속에서 그는 조금씩 어른이 되어갔다.
제대가 다가오자 현수는 긴 시간 잊고 지냈던 세상의 냄새를 떠올렸다. 버스, 사람, 커피, 그리고 도시의 불빛. 그 모든 것이 낯설고도 반가웠다. 그러나 아직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해야 할지 정해진 것은 없었다. 복직 통지서가 오기 전까지는 그저 잠시 머무는 계절 같았다. 밤이면 그는 마을 뒷길을 걸었다. 별빛이 희미한 하늘 아래에서 가은의 이름을 한 번 더 마음속으로 불러보았다. 그녀는 이제, 그의 젊은 날 한가운데에 잠시 머물렀던 봄빛 같은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다시 본가로 돌아가 익숙한 일상으로 복귀하길 원했다. 그러나 현수는 달랐다. 어릴 적 추석이나 설날이 되면, 뉴스 화면 속에서 보이던 귀성열차의 풍경을 부러움 섞인 눈으로 바라보던 그였다. 서울은 언제나 그에게 막연한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렇다고 그곳으로 발령이 날 보장은 없었다.
그는 그저 고졸 출신의 초급사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입사 동기들 중 유일하게 신입사원 표창을 받았던 그는, 마음 한켠에 희미한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언젠가 자신에게도 새로운 기회가 주어질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단단한 믿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