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야근, 그리고 꿈—현수가 쌓아 올린 삶의 층계
Chapter 13 – 서울의 자리, 다시 시작되는 계단
서울 본사 발령을 받은 뒤, 현수는 새로운 리듬에 익숙해지려 애썼다.
도움을 준 것은 지난 대구 근무 시절 함께 TF를 맡았던 타부서의 선배였다.
그는 미리 기흥 숙소 담당자에게 연락해 방을 지정해 두고, 첫 달 숙박비까지 대신 내주었다.
“복직 축하해. 초반엔 정신없을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자리부터 잡아.”
그 한마디가 얼마나 큰 위로였는지 모른다.
아침 출근길은 늘 혼잡했고, 저녁 퇴근길은 더 길었다. 처음엔 상사의 지시를 이해하지 못해 다시 듣는 일도 많았다. 보고서 한 줄을 놓치면 눈치가 따랐다.
하지만 시간이 해결했다. 서울의 속도에 몸을 맞춰야 했다.
처음 몇 주는 그저 버티는 게 하루의 목표였다.
그는 자신이 “고졸 출신, 비주류”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회의 시간, 같은 연차라도 명문대 졸업자들의 목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농담 하나에도 학벌의 그림자가 스며 있었다. 현수는 그런 말들에 직접 반박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 어딘가에서 ‘언젠가 나도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자라기 시작했다.
그는 그 다음 해, 그토록 원하던 야간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다.
전공은 법학으로 정했다.
법관이 될 욕심은 없었지만, 논리와 서술, 그리고 세상을 구성하는 원리를 배우고 싶었다.
입학 설명회를 듣던 날, 법학과 강의실 창문 사이로 붉은 노을이 비쳤다.
그 순간,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회사에서는 여전히 보고서와 숫자에 파묻혀 있었지만, 밤엔 학생증을 목에 걸고 교정으로 향했다. 학교엔 젊은 학생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과 현수의 나이 차이는 3~4살 남짓이었지만, 그 작은 간극이 이상하리만큼 멀게 느껴졌다. 수업 중 교수의 농담에 웃는 타이밍조차 미묘하게 어긋났다.
그래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출석을 못할 때면 동기들이 대신 과제를 제출해 주었고, 시험 기간엔 쪽집게 기출문제를 건네주었다.
“선배, 이번 시험은 조문 순서만 외우면 돼요.”
그럴 때마다 현수는 고맙다는 말 대신, 콩나물삼겹살에 소주 한 병을 내밀었다.
조교는 현수보다 두 살 어렸다.
가끔 강의실 변경 공지를 전화로 알려주거나, 리포트 제출일을 따로 챙겨주기도 했다.
“형, 이번에 3점만 더 받으면 장학금이에요.”
그 말에 현수는 잠시나마 회사의 피로를 잊었다.
3학년이 되던 해, 회사에 문제가 생겼다. 거래처의 회계 오류로 부서 전체가 특별감사 대상이 되었다. 매일 같은 야근의 연속이었다. 며칠 동안은 눈치와 서류, 그리고 피로 속에서 살았다. 학교에 가는 건 사치였다.
그가 가장 듣고 싶었던 ‘행정법’ 강의도 몇 주를 빠졌다.
그때, 한 학우가 대신 필기한 노트를 건네주었다.
“선배, 이거 보세요. 교수님이 시험에 낸다고 하셨어요.”
그녀의 손끝에 묻은 형광펜 자국이 선명했다. 현수는 웃었다.
“고마워. 이 은혜는 꼭 갚을게.”
“그럼… 졸업식 때 밥 사주시면 돼요.”
그녀의 농담에, 순간 가은의 웃음소리가 겹쳐 들렸다. 그는 괜히 하늘을 올려다봤다.
대구의 봄밤처럼 부드러운 서울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4학년이 되자, 그는 이미 지쳐 있었다.
회사 일은 여전히 반복이었고, 학교 생활은 체력과 싸움이었다.
리포트를 제출할 때마다, 책의 문장을 베껴 적으면서도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한 줄이라도, 내 이름으로 남기자.”
결국 그는 학점을 채웠다.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지만, 학사모를 쓸 수 있었다.
졸업식 날, 강의실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조교가 말했다.
“형, 축하해요. 그동안 정말… 대단했어요. 결국 해내셨네요.”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이제야 진짜 서울 사람이 된 기분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비어 있었다. 그가 버텨온 시간의 끝엔 언제나 가은의 빈자리가 있었다. 그녀는 여전히 대구에 있을까, 그녀의 삶은 이제 어떤 모습일까.
연락을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는 전화기를 쥔 채 끝내 번호를 누르지 못했다.
“나는 조금 늦었지만, 그래도 내 삶을 만들었다.
다만 그 삶의 한가운데엔, 여전히 한 사람이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