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녀에게...

대전에서의 재회, 시집 한 권, 그리고 덧없는 사랑

by 신현창

제 6 장 사랑의 마지막 이름

Chapter 14 – 숙녀에게


그녀는 여전히 대구에 있을까. 가은의 지금의 모습은 어떨지 현수는 계속 생각이 난다
‘이대로 잊으면, 정말 끝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며칠 뒤, 술기운을 빌려 용기를 냈다.
전화를 걸었다.


“가은아, 나야… 현수.”


긴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곧 들려온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럽고 어제 통화를 한 것 처럼 전화를 받는다
“현수 씨… 잘 지냈어요?”


현수와 가은은 그렇게 조심스러운 연락을 이어갔다. 처음엔 안부 인사였다.
“서울은 아직도 춥죠?”

“대구는 벚꽃 폈겠네.” 짧은 문장 몇 줄이 전부였지만,
그 안에는 몇 년간의 시간보다 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몇 주 뒤, 현수가 물어본다. “이번 주말, 대전에서 볼까?”
그녀는 잠시 망설이더니 답했다.
“그래요. 서울도 대구도 아닌 곳이라… 좋은데요, 괜찮을 것 같아요.”


봄기운과 파란 가로수 사이의 대전역 광장. 오랜만에 마주한 가은이는 천진난만한 소녀라기보다 단아하고 차분한 성숙한 여성에 가까웠다. 흰 셔츠와 슬림한 슬랙스, 곱게 묶은 단발. 도심의 소란 속에서도 고요히 빛났다.


둘은 가까운 공원으로 향했다. 느티나무가 늘어선 오솔길을 걸으며, 그동안의 일상과 삶을 조심스레 꺼냈다. 공원 안쪽의 대여소에서 자전거를 빌렸다. 현수가 페달을 밟자, 가은이가 뒷자리에서 그의 허리를 자연스레 감싸 안았다. 그 순간, 그녀의 가슴이 그의 등에 조심스레 닿았다. 자전거는 천천히 움직였고, 두 사람 사이의 공기는 미묘하게 흔들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사이로 번진 샴푸 향이 바람을 타고 그의 어깨에 닿았다. 향이 스며드는 그 짧은 순간, 현수의 숨은 알 수 없는 떨림으로 가빠져갔다. 잊고 지냈던 온기가 등 뒤로 전해지며, 마음속 깊은 곳이 조용히 일렁였다. 자전거가 천천히 달리는 동안, 닿을 듯 말 듯——혹은 이미 닿아 있는 감촉이 미세한 떨림을 낳았다. 그는 페달에 집중하려 했지만, 등 뒤의 따뜻하고 부드러운 압력은 현수의 잊고있었던 감정의 문을 천천히 열고 있었다


잠시 후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 현수는 준비해 온 작은 선물을 건넸다. 글쓰기에 관심이 많다던 그녀를 위해 고른 시집 한 권. 책을 받아든 가은이는 고개를 숙이며 조용해졌다. 바로 그때, 공원 스피커에서 변진섭의 **‘숙녀에게’**가 흘러나왔다. 둘은 동시에 가사를 흥얼거렸다. 가사 하나하나가 그날의 공기와 감정에 녹아들었다. 지난 시간들이 노래의 선율 속에 숨어 있던 것처럼.


그날 둘은 저녁까지 함께했다. 분식집에서 어묵과 떡볶이를 먹으며 지난 이야기에 허물없이 웃었다. 아쉬움이 가득한 눈빛 끝에, 현수는 대전에 하룻밤 머물기로 했다. 기차를 놓친 것도, 다음 날 서울로 일찍 출근해야 했던 것도 사실이었지만, 무엇보다 그날 밤 그녀와 더 오래, 단둘이 있고 싶었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하룻밤을 보낼 곳을 찾았다. 방 안은 조용했고, 마음은 복잡했다. 그녀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지만, 그날 밤의 눈빛과 침묵은 어떤 말보다 깊었다. 둘은 서로를 안은 채 조심스럽게 밤을 건넜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그러나 모든 것이 있었던 밤이었다.


이후 몇 차례 더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어느 날부터 그녀의 답이 오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침묵. 불안감. 여러 번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한참 지나 친구를 통해 들은 이야기. 가은이가 당시 현수와 만나던 시기가 사실 기존 남자친구와 잠시 멀어졌던 **‘공백기’**였다는 것. 그녀는 허전함과 외로움을 그의 만남으로 메우려 했던 듯했다. 현수는 그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에게 그녀는… 단지 잠시 머물다 간 따뜻한 휴식처였을까. 그 시절엔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조금 알 것 같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 스스로도 알 수 없이 흔들린다.
“나는 너를 진심으로 좋아했고, 너는 나를 잠시 기대었을 뿐이었지만. 그 계절은, 내 인생에서 가장 깊고 따뜻한 기억으로 남았다.”——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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