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와 미래는 같은 선에 –
Chapter 17 – 늦게 도착한 마음의 조각
서울로 이사 온 지 몇 해가 지난 늦은 오후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혹시 ○○동 성당 다니셨던… 현수 씨 맞으세요?”
조금 머뭇거리던 여성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는 수연이라고 해요. 가은이랑 여고 때 주일학교 같이 다녔어요. 이번에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게 되어… 연락드리게 됐어요.”
그녀는 말을 골라가며 차분히 설명했다. 가은이 최근 이사를 하며 오래 보관하던 물건들을 다시 보면서, 그중 작은 봉투 하나를 “혹시, 서울에 있는 현수에게 연락이 닿으면 전해 달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고, 이름을 또렷이 언급한 것도 아니었지만, 수연은 그 부탁이 가리키는 사람이 누구인지 곧 알 수 있었다고 했다.
“가능하시면… 잠깐 뵙고 전해드리고 싶어요. 멀리서 온 건 아니고, 회사 근처 카페면 괜찮을까요?”
퇴근 무렵 비가 조금씩 내렸다. 유리문이 뿌옇게 김이 서린 작은 카페, 사람들 소음이 낮게 깔린 자리에서 수연은 회색 손잡이 달린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가은이가 특별히 말을 아끼는 편이라…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어요. 다만, 이건 당신께 가야 할 것 같다고, 그렇게 말했어요.”
봉투 안에는 손바닥만 한 미니 다이어리와 오래된 사진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다이어리를 펼치자 수년 전의 달력 면이 나왔다. 손톱만 한 작은 점들이, 일요일마다 찍혀 있었다. 어떤 달에는 ‘●’, 또 어떤 달에는 아주 희미한 ‘S’처럼 보이는 표시가 반복되어 있었다. 설명은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 반복엔 이성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리듬이 있었다.
현수는 달력 위의 작은 점들을 따라가듯 손끝으로 더듬었다. 그 무렵, 자신이 어떤 아침마다 정류장 오른쪽 기둥에 기대 서 있던 모습이 겹쳐 올라왔다. 책을 읽는 척하면서, 코너를 돌아 나타나던 한 사람을 기다리던, 오래전의 습관처럼 찍힌 점들이었다.
사진은 성당 여름행사 때 찍은 단체 사진이었다. 색감이 바래 사람들의 얼굴이 흐릿해졌지만, 구석을 확대하듯 들여다보니 낯익은 두 실루엣이 작게 포개져 있었다. 멀찍이 서 있는 자신과, 그 옆을 스쳐 지나가던 그녀. 의도된 포즈는 아니었을 터, 그저 우연히 같은 프레임에 들어와 버린 장면.
현수는 사진을 뒤집었다. 뒷면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연필로 적혀 있었다.
“다음 주엔, 내가 먼저 말을 건낼수 있을까.”
누구에게 쓴 문장인지, 언제 적은 것인지, 단정할 수 없는 한 줄이었다. 그러나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명하게 닿는 목소리였다. 그는 한동안 사진 뒷면을 손가락으로 천천히 문질렀다. 잉크가 아닌 연필의 눌림, 종이의 얇은 결, 문장을 적던 손의 속도가 느리게 전해지는 듯했다.
수연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현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냥… 오래전 향기가 나는 것 같네요.”
수연은 카페 창가를 한번 바라보고 말했다.
“가은이는 늘 조용했지만, 이상하게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사람이었어요. 성당 마당에서 누구랑 스쳤는지, 어느 주일에 비가 왔는지, 그런 걸 기억하더라고요. 이번에 대구에서 이사 준비를 하면서 저에게 그런 말을 했어요. ‘전해달라’고. 이유는 묻지 않았어요. 그냥… 알고 싶지 않은 일도 있잖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카페 스피커에서 흐르는 노래가 바뀌었고, 유리창엔 빗방울 자국이 엇갈린 선으로 남았다. 현수는 다시 다이어리를 펼쳐 어느 해의 10월로 가 보았다. 그해의 일요일마다 찍힌 점들 사이로, 한 번쯤 ‘별표’ 같은 표시가 보였다. 아마도 아무 의미 없는 장난기였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그는 그 표시가 한 사람의 용기와 망설임이 닿는 지점 같습니다, 라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수연은 가볍게 웃었다.
“이제 제 일은 끝난 것 같네요. 전해야 할 걸 전했으니까요.”
그녀는 더 묻지 않았고, 더 설명하지도 않았다. 딱 그만큼의 거리였다. 서로의 젊은 시절을 한 프레임만큼 공유했지만, 이제는 다른 곳에서 각자의 계절을 사는 사람들처럼.
카페 밖으로 나오니 비가 잦아들었다. 골목의 간판 불빛이 젖은 아스팔트 위에 번졌다. 현수는 가방 속 봉투를 다시 확인하고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사진 뒷면의 문장이 마음속에서 여러 형태로 다시 나타났다. 다음 주엔, 내가 먼저, 말을 건낼수 있을까. 문장은 늘 그랬듯, 끝내 물음표로 맺혀 있었다.
그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이 기억이라 부르던 것들이 사실은 한 사람의 망설임과 다른 사람의 용기가 엇갈리며 만든 작은 점들이었다는 것을. 누군가의 다이어리 한 칸에 찍힌 점처럼, 때로는 표시만 있고 설명은 남지 않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회사 앞에 이르러 잠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과 눅눅한 구름이 밤을 덮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이상하게도 확신할 수 있었다.
보이지 않아도, 별은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을 .
그 밤이 언덕의 냇물을 지나던 날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그때도 별은 어딘가에 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현수는 조심스레 다이어리와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내일이면 다른 문서들과 함께 책상 서랍 맨 뒤쪽 칸에 놓이겠지만, 그 의미가 사라지는 건 아닐 것이다.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오랫동안 접혀 있던 계절이, 오늘 자신에게도 조용히 접혀 들어왔다. 말로 남기지 못할 문장이었기에, 더 오래 남을지도 몰랐다.
그는 마지막으로 짧게 속삭였다.
“고맙습니다.”
누구에게 한 말인지 분명하지 않았지만, 듣는 이가 꼭 있어야 할 말처럼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정류장의 기둥, 다방의 두 번째 커피, 바다로 가던 버스, 언덕의 밤공기, 그리고 오늘의 봉투. 소리가 아닌 표식들로 이어진 이야기였다.
“별이 보이지 않던 밤에도, 별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안다. 어떤 기억은 지나간 것이 아니라, 계속 살아 있는 방향이라는 것을.”
그는 깨달았다. “과거와 미래는 멀리 떨어진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바라보는 방향이 다를 뿐일지도 모른다고.” 과거는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선택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시간 위에 서 있으며, 그렇기에 여전히 하루를 시작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