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창수가 서울에서 내려왔을 때, 집 안의 공기는 기적처럼 정리되어 있었다. 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부모는 이미 전날의 일을 대부분 알고 있었고, 앞으로의 방향까지 정리해 두고 있었다. 학업과 운동을 병행하되, 성적 관리와 훈련 모두에 책임을 지는 조건. 이틀 전의 무모한 상경과 항의성 가출이 뜻밖의 결과를 낳은 셈이었다.
창수는 그저 공부도, 운동도 예전처럼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았다. 모든 것이 다시 제자리에 놓인 듯 보였다.
그러나 운동장은 달랐다.
그가 떠나 있던 시간 동안, 그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워 둔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언제나 주전 투수, 1선발로 서 있던 자리는 이미 다른 선수들의 몫이 되어 있었다. 1년 가까이 방과 후 훈련과 합숙에 빠졌던 공백은, 기대나 사정으로 메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게다가 몸도 달라져 있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1학년까지, 창수의 신체 조건은 또래들 사이에서 단연 돋보였다. 그러나 1학년과 2학년 사이, 아이들의 성장은 하루가 다르게 달랐다. 어떤 아이는 한 달 만에 키가 십 센티미터 가까이 자랐고, 체격도 눈에 띄게 달라졌다. 어느새 창수의 ‘특별함’은 평범한 조건이 되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3학년 선배의 배려였다. 그는 창수에게 5선발 수준의자리 하나를 양보케 했고, 방과 후 훈련에 다시 합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그 선배는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장비를 정리하면서, 자신의 야구 장비를 창수에게 맡기기도 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의 고가 장비들이었다. 특히 검은색 미즈노 글러브는 팀 안에서도 유명한 물건이었다.
그러나 창수는 그 장비에 손대지 않았다. 허락 없이 쓰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다. 자리를 챙겨준 형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부모 한 분이 음료수를 들고 찾아오며 잠시 훈련이 중단되었다. 그 사이, 선배의 글러브가 보이지 않게 되었다. 이상한 소문은 순식간에 돌기 시작했다.
민재가 담임선생님에게 자랑처럼 말했던 이야기가 발단이었다. 민재는 창수와의 친분을 과시 하고 싶었던 거다. “제 친구 창수가요, 검은 (미즈노)글러브 끼고 던지는 모습은 거의 프로선수 정도 수준의 볼을 던져요.”
그 말은 몇 번의 전달을 거치며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어 돌아왔다. 창수가 선배의 글러브에 손을 댔고, 그 뒤 글러브가 사라졌으며, 마지막으로 쓴 사람이 창수라는 식의 이야기였다.
의도치 않게, 창수와 민재 사이에는 서먹한 공기가 흘렀다. 서로를 믿고 싶었지만, 말하지 못한 오해가 마음에 쌓였다.
며칠 뒤, 진실은 뜻밖의 곳에서 밝혀졌다. 운동장을 비운 사이, 누군가 가져갈까 봐 관리장 선생님이 글러브를 따로 치워 두었던 것이었다. 모든 오해는 풀렸지만, 둘 사이의 거리감은 한동안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 무렵, 또 하나의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창수에게서 뜻밖의 재능을 가장 먼저 알아본 사람은 그 3학년 선배였다. 투구는 분명한 우완이었지만, 연습 중 우연히 왼손으로 배트를 쥔 창수의 타격을 본 것이다. 힘보다는 정확했고, 타구는 묵직하게 뻗어나갔다.
선배는 감독에게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투수는 오른손으로 하되, 타자는 왼쪽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연습 삼아 좌타석에 들어선 창수는 뜻밖의 감각을 느꼈다. 공은 생각보다 잘 맞았고, 타격감은 분명했다. 그렇게 그는 투수이면서 좌타자로 방향을 잡기 시작했다. 양타(스위치히터)까지는 아니더라도, 타선에서는 좌측에 전념하기로 했다.
그 선배가 고등학교로 진학하고, 어느새 창수는 3학년이 되었다. 주전 자리는 아직 확실치 않았고, 경기력 또한 만족스럽지 못했다. 그러나 창수는 알고 있다. 이제 자신은 더 이상 빠른 성장이라는 ‘특혜’를 가진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대신, 오래 버틸 수 있는 체력과 쉽게 꺾이지 않는 근성, 좌타석에서의 정교함과 우타석에서의 힘을 조절할 수 있는 유연함이 남들보다 조금은 다른 모습의 또다른 자산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그것들은 눈에 띄는 재능도, 단번에 승부를 바꿀 대단한 무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버텨 온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오직 자신만의 무기였다. 그렇게 창수는 깨닫고 있었다. 중학교 시절의 야구는, 누군가보다 앞서기 위한 싸움이 아니라 스스로를 끝까지 믿어 보기 위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좌절과 오해, 그리고 작은 가능성을 품은 채 조용히 하나의 장을 마무리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