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벽돌의 학교

낯선 언어, 낯선 거리

by 신현창

제9(2-1)장


민재가 처음 맞이한 미국의 아침은 생각보다 조용했다.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은 한국과 다르지 않았지만, 집 안에 흐르는 공기는 전혀 달랐다. 부엌에서는 베이컨 굽는 냄새가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고, 호스트 가족의 대화는 빠르고 높낮이가 분명했다.

“Good morning, Minjae!”

밝은 인사 뒤에 이어진 말들은 민재의 귀에 걸리지 않고 흩어졌다. 그는 알아들은 척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식탁 위에 놓인 시리얼만큼이나 마음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첫 등교 날, 민재는 캘리포니아의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Southlands Christian Schools의 정문 앞에 섰다. 40년 가까운 세월을 견뎌온 학교의 붉은 벽돌 건물은 차분하면서도 위엄이 있었다. 잘 정돈된 넓은 잔디밭 위로 곳곳에 세워진 십자가 표지판은 이곳이 오랜 전통을 지닌 기독교 사립학교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학생 수가 많지 않아 교사와 학생이 가족처럼 가깝게 지내는 곳, 국제 학생들을 위한 안정적인 홈스테이 시스템이 갖춰진 이 학교는 지역 사회에서도 신뢰받는 평온한 요람이었다. 하지만 낯선 땅에 갓 떨어진 민재에게 그 따뜻한 풍경은 오히려 넘기 힘든 성벽처럼 느껴졌다. 무리를 지어 서로의 어깨를 두드리며 농담을 주고받는 아이들 사이에서, 민재는 깔끔하게 다려 입은 셔츠가 무색할 만큼 오늘도 혼자였다.



수업 시간은 더 깊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특히 체육 시간의 사건은 민재에게 잊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선생님이 말을 했다. “Okay everyone, pair up!”(짝을 지어보세요)

민재는 순간 멈칫했다. 'Up'으로 끝나는 그 단어가 마치 줄을 맞추라는 **'Line up'**처럼 들렸다. 그는 뒤로 가서 멀둥이 서 있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분주하게 서로의 눈을 맞추며 둘씩 짝을 짓기 시작했다. 덩그러니 혼자 남은 민재에게 선생님이 다가와 물었다.

“Why are you standing there?”(왜 거기 서 있어?)

아이들의 킥킥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민재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어 하나를 잘못 이해했을 뿐인데, 마치 세상 전체로부터 낙오된 기분이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민재는 생각했다. 줄을 서라는 게 아니었는데 주변 눈치를 조금만 더 봤어도 되는데 하며 별것도 아닌 것에 하지만 자책과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물론 어둠만 있었던 건 아니다. 수학 시간, 칠판 가득 적힌 숫자들이 민재에게는 유일하게 익숙한 언어였다. 선생님이 곤란해하는 문제를 보고 민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들었다.

“Can… can I try?”

그가 풀어낸 ‘24’와 함께 선생님의 “Correct”(정답)라는 말이 떨어지자, 교실의 공기가 미세하게 변했다. “너 수학 잘한다(You’re good at math)”며 말을 걸어오는 아이들도 생겼다. 하지만 그 작은 성취감도 민재의 마음속 깊이 자리 잡은 근본적인 **‘자격지심’**을 완전히 씻어내지는 못했다. 어색한 발음과 느린 반응은 여전히 그를 옥죄고 있었다.



사건은 어느 쉬는 시간, 북적이는 복도에서 일어났다. 누군가 빠르게 지나가며 민재의 어깨를 쳤다. '툭.' 사과도 없이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보며 민재의 머릿속에는 그간 쌓였던 모든 감정이 들불처럼 번졌다.

'나를 무시한 거야. 상대적으로 왜소한 덩치에 동양인 이라서 얕잡아본 거야.'

민재는 달려가 상대의 어깨를 밀쳤다. 서툰 영어 대신 주먹이 먼저 나갔다. 복도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결과는 교장실 호출과 징계였다. 차가운 교장실 의자에 앉아 민재는 깨달았다. 자신이 화를 낸 건 상대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너무 약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며칠 뒤, 징계의 후유증으로 가라앉아 있던 민재의 눈에 게시판의 한 줄이 들어왔다. [Wrestling Club (레슬링부)]

몸과 몸이 직접 부딪히는 운동. 말이 필요 없는 곳. 민재는 홀린 듯 신청서에 이름을 적었다. 첫 훈련 날, 매트 위에 선 민재에게 코치는 짧고 강렬한 첫마디를 던졌다.

“여기서는 넘어지는 법을 먼저 배운다. 그리고 어떻게 다시 일어나는지를 배우지.”

민재는 그 말을 곱씹었다. 낯선 언어와 낯선 거리 속에서, 민재는 이제 도망치는 대신 매트 위에서 정면으로 부딪히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틀리고, 웃음거리가 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다면, 이곳은 더 이상 낯선 땅이 아닐 것이었다.

그는 이제야 진짜 미국의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매트에서 몸을 부딪히면서 처음에는 별 말이 필요 없이 친구들간의 소통이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방과후 하교길을 같이 가게 되고 친한 친구가 한두명씩 생기고 이후 학교 생활에 재미가 있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토록 힘들었던 친구들의 말소리와 선생님의 강의소리가 조금씩 들리기 시작 했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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