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발걸음
제 13 장
민재는 공부만 잘하는 학생이 아니었다.
여러 방면에서 재능이 남달랐고,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 또한 지니고 있었다.
캘리포니아에서도 그를 따르는 친구들이 자연스럽게 모여들었다.
고등학교 졸업 무렵에는, 조금 과장하자면 ‘아이돌’이라는 말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입학했다.
어릴 적 부모님의 영향으로 책을 가까이했던 시간 덕분에,
깊이는 다소 얕을지라도 폭넓은 지식과 상식을 갖추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어른들 사이에서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던 아이였다는 이야기가,
이미 오래전부터 주변에 퍼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와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구들은 많았고, 관계는 자연스러웠다.
법학이라는 전공 또한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그에게 법이란,
이미 가지고 있던 상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는 과정에 가까웠다.
상식의 범위 안에서 논리적으로 판단하고,
자신의 생각을 또박또박 말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면 충분히 잘한다는 평가를 듣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얼마 전, 작은 소동이 하나 있었다.
친구들 사이에서 시작된 사소한 말다툼이
결국 주먹다짐으로까지 번졌고,
학교 보안 요원이 개입하고 나서야 상황이 정리되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이유는 허탈할 만큼 단순했다.
점심을 먹던 중,
누가 더 빨리 먹느냐를 두고 시작된 장난 같은 내기.
먼저 먹기 시작한 것을 두고 시비가 붙었고,
결국 감정이 격해져 싸움으로 번졌던 것이다.
어이없으면서도, 어쩌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그때 민재가 나섰다.
하나하나 상황을 짚어가며 질문을 던졌고,
마치 검사처럼 논리를 세워갔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판사처럼 결론을 내렸다.
결국 두 사람은 서로 손을 내밀었고,
어색하지만 분명한 화해로 상황은 마무리되었다.
주변에서는 웃으며 넘겼지만,
그날 이후, 민재에게는 아주 미세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첫 학기는 생각보다 빠르게 흘러갔다.
넓은 캠퍼스, 바쁜 강의.
민재는 정치학과 글쓰기 수업을 중심으로 하루를 채워 나갔다.
법학을 목표로 한다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준비의 연속이었다.
문제는 내용이 아니었다.
속도였다.
교수의 말은 빠르게 흘렀고,
학생들의 반응은 그보다 더 빨랐다.
질문은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의견은 망설임 없이 튀어나왔다.
민재는 노트를 빼곡히 채우면서도
항상 한 박자 늦게 따라가는 자신을 느꼈다.
정치학 입문 수업이 있던 날이었다.
강의실은 거의 가득 차 있었고,
앞자리에는 토론을 즐기는 학생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교수는 부드러운 말투였지만,
그 안에는 단정적인 확신이 담겨 있었다.
“Today, we discuss equality under the law.”
(오늘 우리는 법 아래의 평등에 대해 논의합니다)
‘법 앞의 평등.’
그 한 문장이 민재의 귀에 또렷하게 들어왔다.
“What does equality really mean?”
(평등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곧이어 학생들의 답이 이어졌다.
“Equal opportunity.”
(평등한 기회)
“Fair application of law.”
(법의 공정한 적용)
그리고 교수의 시선이 민재에게 향했다.
“You. What do you think?”
(거기, 당신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순간, 공기가 멈춘 듯했다.
“I think… equality is not same for everyone.”
(제 생각에는… 평등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지 않습니다)
“Some people… start from different place.”
(어떤 사람들은… 서로 다른 출발선에서 시작합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Can you be more precise?”
(좀 더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겠습니까?)
그 순간, 문장은 머릿속에서 흩어졌다.
그리고 뒤쪽에서 들려온 작은 웃음소리.
작았지만, 분명히 들렸다.
“Let’s move on.”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
토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이어졌다.
수업이 끝난 뒤에도 민재는 쉽게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끝까지 말하지 못했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컸다.
며칠 뒤, 중간 발표가 있었다.
주제는 ‘법 앞의 평등과 현실의 괴리’.
민재는 자신의 경험을 담아내고자 했다.
복도에서의 오해,
레슬링으로 증명해 왔던 시간,
그리고 말하지 못했던 순간들.
발표는 차분하게 시작되었다.
“My topic is… equality and reality.”
(제 주제는… 평등과 현실입니다)
하지만 중간에 이르렀을 때—
“Let me clarify what you’re trying to say.”
(당신이 말하려는 바를 제가 정리해보겠습니다)
교수는 말을 이어받아
더 정확하고 매끄럽게 내용을 정리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은, 민재의 말이 아니었다.
발표가 끝난 뒤, 교수는 짧게 말했다.
“Good effort. Work on your clarity.”
(좋은 시도입니다. 표현의 명확성을 더 기르세요)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한 말도 아니었다.
강의실을 나서며 민재는 처음을 떠올렸다.
말이 통하지 않던 시간.
설명할 수 없던 답답함.
지금은 다르다.
하지만 여전히 넘지 못한 선이 있었다.
‘이게… 내가 넘어야 할 벽이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레슬링에서 배운 것이 있었다.
넘어지는 것은 끝이 아니었다.
다시 일어나는 것이 중요했다.
“…다음에는, 내가 끝까지 말한다.”
캠퍼스는 여전히 분주했다.
사람들은 웃고, 토론을 이어갔다.
그 속에서 민재는 다시 걸어갔다.
이번에는,
조금 더 단단한 발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