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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폰에, 내가 버린 알람소리

기억이 감각이 음습한다.

by 원성진 화가

알람소리는 늘 처음엔 친구처럼 다가온다.

새벽의 적막을 깨우지 않을 만큼 부드럽고, 하루를 깨울 만큼 성실한 작은 벨소리.

그중에서도 마음에 쏙 드는 한 소리를 고르고 골라 선택할 때면,

잠결의 내가 이 소리에 살금살금 이끌려 나와 하루를 시작하리라는 기묘한 믿음이 생긴다.


그런데 사람의 귀란 어쩐지 배신을 잘한다. 머리가 배신한건가?

몇 번 듣고 나면 그 소리는 더 이상 ‘선택한 소리’가 아니라 ‘방해하는 소리’가 된다.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사랑은 짜증으로 바뀌고, 익숙함은 피로로 변한다.

결국 며칠 못 가 다시 그 설정 화면 앞에서 새로운 알람을 찾아 헤매게 된다.

마치 늘 ‘새로움’만이 나를 흔들어 깨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처럼.


길을 걷다 문득, 누군가의 주머니나 가방 속에서 내가 예전에 버린 알람과 똑같은 음이 튀어나올 때가 있다.

그 순간 몸속의 심장이 잔뜩 움츠러든다. 그때의 기억들이 감각들이 음습한다.

내 것이 아닌데도 어딘가에서 호출받은 것 같은 기분.


나를 일으켜 세우려던 소리가

이제는 내가 아닌 타인의 하루를 재촉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서늘하다.


내가 지나쳐 온 시간들이,

내가 버리고 바꾼 선택들이,

타인의 일상 안에서 낯설게 울려 퍼지는 듯하다.


벨소리도 마찬가지다.

한때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과 함께 두근거리던 소리인데,

어느 순간 듣기만 해도 심장 깊은 곳을 건드리는 기묘한 피로감으로 변해버린다.


반짝이는 신선함도, 애틋한 신호도 모두 지속되지 않는다.

소리는 익숙함 속에서 노화하고, 우리의 감정은 축적되어 소리를 다른 의미로 물들인다.


그러고 보면, 알람이나 벨소리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선택하고, 곧 질려버리고, 다시 갈아치운다.

새로움은 희망처럼 다가오지만, 결국 익숙함의 그림자가 뒤따라온다.


낯선 소리를 택하는 행위는 어쩌면 ‘내일의 나’를 믿는 작은 의식이다.

이 음색이라면 피곤한 나를 어루만져 일으켜 줄 거라는 기대,

혹은 이 소리라면 오늘의 마음을 조금 더 부드럽게 건드려 줄 거라는 믿음.

하지만 모든 소리는, 결국 나의 시간을 닦아내며 나도 모르게 닳아 없어진다.


그 소리가 바뀌는 건 내가 변했기 때문이고,

내가 변한 이유는 매일의 삶이 조금씩 쌓이고 무게를 더했기 때문이다.

소리가 싫어진 순간은, 나의 하루가 변한 신호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알람을 또 바꾸는 일도,

누군가의 알람에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일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지금의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시간이 나를 흔들고, 감정이 내 귀를 다시 조율하고 있다는 증거다.


결국 우리는 소리와 함께 나아간다.

좋아하다가 싫어지고, 익숙하다가 이별하고,

다시 다른 소리를 맞이하며 앞으로 나아간다.

소리의 교체 속에서 삶의 변화가 일어난다.

그리고 그 변화가 모여

내일의 마음을 다시 흔들어 깨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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