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신세계

선택할 수 없는 자들의 왕국

by 원성진 화가

영화 <신세계>는 이야기의 기억보다 먼저 감각이 남는다. 빛이 닿지 않는 회의실의 공기, 오래 멈춰 있던 시계처럼 느리게 흐르는 침묵, 그리고 사람의 얼굴 위에 겹겹이 쌓인 정체성의 균열. 이 영화는 세계가 작동하는 방식을 노출한다. 그래서 관객은 서사 그 안에 갇힌다.


<신세계> 의 서사는 '선택'이라는 개념 자체를 해체하는 이야기다. 인간은 선택할 수 있다고 믿으며 살아가지만, 이 영화 속 인물들은 이미 선택된 자리에서 숨 쉬고 있을 뿐이다. 이자성의 삶은 자유의 외피를 두르고 있으나, 구조적으로 봉인되어 있다. 경찰과 조직 사이의 이중 신분은 개인의 능력이나 의지로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는 개인을 넘어선 시스템의 문제이며, 구조가 인간을 어떻게 배치하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실에 가깝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말한 권력은 위에서 아래로만 흐르지 않는다. 권력은 관계 속에서 미세하게 분산되고, 사람들의 몸과 선택을 통과하며 작동한다. <신세계> 의 세계는 정확히 그런 권력의 장이다. 경찰은 정의를 대변하는 듯 보이지만, 그 정의는 사람을 보호하기보다 관리한다. 조직은 범죄의 상징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에는 기묘할 만큼 인간적인 감정이 남아 있다. 이때 선과 악의 구분은 흐려지고, 윤리는 판단의 기준을 잃는다.


이 영화가 서늘한 이유는, 관객에게도 같은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당신이 이 구조 안에 있었다면, 과연 다른 선택이 가능했을까.” 우리는 흔히 도덕적 판단을 개인의 문제로 환원하지만, <신세계> 는 그 판단의 전제를 무너뜨린다. 인간은 언제나 구조 속에서만 움직일 수 있으며, 선택이란 그 구조가 허용한 범위 안에서만 발생한다는 사실을 조용히 드러낸다.


연출은 이러한 사유를 과장 없이 밀어 넣는다. 카메라는 화려하게 움직이지 않고, 인물의 얼굴을 오래 붙잡는다. 그 얼굴에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갈등이 쌓여 있다. 침묵은 말해질 수 없는 것, 선택의 불가능성, 이미 결정된 운명을 대신하는 언어다. 총성이 울리기 전의 정적이 유난히 길게 느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폭력은 갑작스럽게 발생하는 사건처럼 보이지만, 사실 오래전부터 준비된 결론에 가깝다.


특히 이자성과 정청의 관계는 이 영화의 윤리적 중심을 이룬다. 그들은 서로를 속이면서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다. 배신과 신뢰가 동시에 존재하는 이 관계는 현대 사회의 인간관계를 닮아 있다. 우리는 조직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살아가고, 그 역할은 종종 우리의 진심과 충돌한다. 그 충돌이 반복될수록, 인간은 점점 자기 자신으로부터 멀어진다.


마지막 장면에서 권력의 자리에 오른 인물은 승리자의 얼굴을 하고 있지 않다. 그 자리는 고독의 밀실에 가깝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권력은 함께 있을 때만 유지된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의 정상은 철저한 고립 위에 세워진다.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곧 인간적인 관계의 종결을 의미한다면, 그 생존은 축복처럼 보이지 않는다.


〈신세계〉가 오래 남는 이유는, 이 영화가 끝난 뒤에도 질문이 계속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연 얼마나 자유로운 존재인가. 우리가 믿는 선택은 어디까지가 우리의 의지이며, 어디부터가 구조의 요구일까. 영화는 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한 세계를 완성도 높게 구축해 우리 앞에 놓는다. 그 세계를 끝까지 바라본 관객은, 스크린 밖 현실 역시 조금 다르게 보게 된다.


완벽한 서사란 흠이 없는 이야기를 의미하지 않는다. 끝난 뒤에도 쉽게 빠져나올 수 없는 세계를 남기는 힘에 가깝다. 〈신세계〉는 그 힘을 정교하게 구현한 영화다. 그리고 우리는 그 세계를 떠났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 아직 그 안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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