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날, 시간 밖에 서 있었다

파리

by 원성진 화가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몸이 내 것이 아닌 듯 낯설었다.
밤사이 누군가 두들겨 패서 관절과 근육의 자리를 바꾸어 놓은 것처럼, 감각들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었다. 밤새 창가 쪽 잠자리의 으스스한 기운, 감기 기운? 울렁거리는 속이 겹쳐 일어서는 일조차 마음속에서 여러 번 허락을 받아야 했다.

이럴 때 사람은 조용히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왜 하필 오늘일까 하고. 그러나 삶은 언제나 가장 정확한 순간에 우리를 멈춰 세운다. 잠시 서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게 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일어나야 했다. 여행에서는 일행의 일정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 손가락을 따고 약을 삼킨 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버스는 콩코르드 광장을 말없이 건넜다.

누군가는 이곳에서 사랑을 약속했고, 그 누군가는 같은 자리에서 삶을 내려놓았다. 한 장소가 서로 다른 운명을 함께 품고 있다는 사실은 세상이 얼마나 깊은 침묵 위에 서 있는지를 조용히 알려 준다. 역사를 안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의 무게를 더 또렷하게 느끼는 일 일 것이다. 우리는 늘 현재에 서 있으면서도 현재가 얼마나 깊은지 자주 잊고 살아간다.


오랑주리의 공기는 바깥보다 따뜻했고, 거칠던 호흡은 서서히 잦아들었다. 그림들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대화야말로 가장 오래 남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진실은 언제나 소리보다 조용한 곳에 머문다.


피카소의 그림 앞에서 현실은 조용히 흩어지고 있었다. 형태는 부서지고, 얼굴은 기억처럼 겹쳐졌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존재인지, 아니면 견딜 수 있는 모양으로 다시 배열하며 살아가는 존재인지 문득 알 수 없게 되었다. 예술은 그 질문을 숨기지 않는다.


마티스의 색은 이른 아침의 음악 같았다. 밝지만 서두르지 않았고, 가볍지만 결코 얕지 않았다.


몸이 아픈 날에도 햇살은 변함없이 창문을 넘어 들어온다. 세상은 한 번도 우리에게 맞추어 멈춘 적이 없다. 그래서 오히려 위로가 된다. 우리가 주저앉아 있어도 세상은 계속 아름답기 때문이다. 지겨울 삶이 웃프게 한다.


클레의 그림 앞에서는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었다. 선과 색은 문장보다는 훨씬 짧고, 의미는 설명보다 깊고 풍부했었다. 위와 아래, 안과 밖 같은 경계는 우리가 불안을 견디기 위해 그어 둔 연필선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본래 흐름인데 우리는 그 흐름에 이름을 붙이며 겨우 안심한다.


수련이 있는 방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잠시 시간 밖으로 밀려난 사람처럼 서 있었다. 빛은 물 위에서 조용히 부서지고, 순간은 사라지지 않은 채 머물러 있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순간들은 형태를 버린 채 우리 마음속에서 오래 살아남는다.


밖으로 나왔을 때 몸은 더 무거워졌지만 세상은 이상하리만치 또렷해 보였다.

고통은 삶을 흐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불필요한 것들을 조용히 지워 버리기도 한다. 남는 것은 단순하다. 빛과 바람과 물, 그리고 아직 걷고 있는 한 사람.


센 강 위의 공기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노을의 냄새가 스며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느끼는 순간, 사람은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에 가까워진다. 이해보다 먼저 오는 감정이 삶의 가장 깊은 곳을 만든다.


오르세로 향하며 생각했다. 기차역이 미술관이 되듯 우리의 실패 또한 언젠가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지 모른다고. 지금의 끝이 또 다른 시작의 문이 되는 일은 삶에서 그리 드문 일이 아니다.


고흐의 밤은 실제 하늘보다 더 살아 있었고, 모네의 건초더미에는 시간이 조용히 쌓여 있었으며, 드가의 발레리나들 뒤에는 아름다움을 견디는 고통이 숨 쉬고 있었다. 완벽함은 흔들리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시간에 가까운 것인지도 모른다. 흔들리기 때문에 우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밀레의 들판에서는 침묵이 가장 크게 울리고 있었다. 존엄은 아무도 보지 않는 자리에서 조용히 견디는 삶 속에 머문다.


미술관을 나설 때 나는 거의 아무것도 담아 가지 못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거대한 폭포 앞에서 빈 손을 들고 서 있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곧 알게 된다. 모두 담지 못했다는 감각조차 이미 충분히 깊은 경험이라는 것을. 삶에서 중요한 것들은 흔적으로 남는다.

해 질 녘의 센 강은 낮과 다른 빛으로 흐르고 있었다. 시간은 같은 방향으로 가지만 의미는 순간마다 다른 색을 띤다. 아픈 몸으로 바라본 파리는 건강할 때보다 더 선명했다. 결핍은 세상의 미세한 결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더 깊이 바라본다. 완벽하지 않은 순간들이 오히려 오래 마음에 남는다.


빛이 흔들리듯 삶도 흔들린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은 조용히, 그리고 분명하게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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