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붓 통은 혼색

VIOLET BLUE

by 원성진 화가

2024/12/23/16:00


숙소에 짐을 내려놓고, 이곳이 런던임을 알리는 빨간색 2층 버스에 올랐다. 차창 밖으로 펼쳐진 런던의 풍경은 낯설면서도 묘하게 친숙했다. 오래된 벽돌 건물들, 거리 곳곳을 장식한 크리스마스 조명, 그리고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한 흐린 하늘. 파리와는 다른 감성이었다. 모든 것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버스가 움직일 때마다, 도시의 풍경은 마치 슬라이드 필름처럼 부드럽게 흘러갔다.


버스에서 내려 테이트 모던으로 향했다. 과거 발전소였던 이 웅장한 산업 건축물이 현대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모습은 형태의 보존만으로도 존재감을 뿜어냈다. 겨울바람이 차가웠지만, 미술관을 향한 발걸음은 온도를 느끼지 못했다. 거대한 터빈 홀에 들어서는 순간, 압도적인 공간감이 온몸을 감쌌다. 높은 천장과 광활한 내부는 마치 또 다른 차원의 세계로 들어온 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미술관 한가운데는 한국 이미래 작가의 대규모 설치미술이 자리하고 있었다. ‘열린 상처’라는 설치작품. 얇게 찢어진 갈색 천들이 높이 매달려 흔들리지 않는 듯 흔들리며, 부드럽게 겹쳐지는 모습이 마치 이 공간이 새로 태어나기 전의 모습으로, 시간의 흐름을 뒤집어 시각화한 듯했다. 그 아래 서서 시선을 올리자 거대한 스케일이 몸을 감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작품은 무겁게 나를 눌렀고, 산업사회의 생산물과 현대사회의 쓰레기가 맞닿아 있는 듯한 그 감각은 돌이킬 수 없는 폐허 속을 거니는 듯한 느낌을 남겼다.

전시장 곳곳에는 현대미술관답게, 도발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 눈길을 끈 작품이 있다. 한겨울 혹독한 추위의 야외에서 작가가 순간 얼어붙은 자신의 배설물을 석고로 형상화한 작품은 창작의 고통과 집념을 날 것 그대로 담고 있었다. 인간의 본능과 물리적 현실을 직시하게 만드는 이 작품은 불편함을 넘어선 어떤 근원적인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예술이란 결국 본질을 드러내는 것일까, 아니면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일까? 칸트의 미학에 따르면 이 작품은 우아미가 아닌 불쾌에서 쾌로 바뀌는 숭고미를 만들려고 했지만, 불쾌에서 제동이 걸린 듯하다. 하지만, 단토의 생각대로라면 모든 것은 열려 있다. 암튼, 알 수 없는, 해석 불가능한, 굳이 해석하지 않아도 되는, 그래도 미술을 전공한 자로서 평론해야만 하는, 많은 생각들이 복잡하게 배설물들처럼 널렸다.


배꼽을 소재로 자신만의 해석으로 만든 액자 작품도 흥미로웠다. 배꼽은 탄생과 연결, 그리고 독립을 상징한다. 작가는 이 작은 연결의 흔적을 확대함으로써 우리 존재의 근원을 탐색하게 했다. 배꼽이라는 신체의 흔적이 타인과의 연결을 의미하는 동시에, 결국엔 혼자가 된다는 인간의 숙명을 은유하는 듯했다. 이 시대 화두 중에 연결이라는 또는 소통이라는 것에 대해 시간을 갖고 생각해 보기로 했다. 그 작품 앞에서 나는 스스로의 존재가 어떤 연결을 가지고 있는지, 또 가지려 하는지를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또한 끊어 내야 함은 생존을 위한 필수이고, 이런 끊어짐이 가지는 외로움은 인간만이 느끼는 감정일까? 끊어 내기 위해 사는 것일까? 이어가기 위해 사는 것일까? 흔적(배꼽)을 만지며 과거의 기억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일까?


전시장 한편에서는 빔프로젝션을 이용한 영상 작품이 공간 네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여러 개의 필름이 겹겹이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해체하고 연결하고, 쌓아 올리고 있었다. 화면의 겹침과 움직임, 벽과 바닥을 가로지르는 빛의 흐름이 새로운 차원의 서사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영상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라 그 서사의 일부가 되었다. 화려함이나, 초현대적 기술이나, 복잡함이 아니라, 아날로그의 단순함이 예술적 완성을 만들어 낼 때, 감동은 배가 되는 것 같았다. 또한, 2018년 강이연 작가의 Casting이라는 작품이 오버랩되면서 심플이 가장 강력한 예술의 무기임을 확인했다.


남성 성기를 탁본한 작품은 불편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예술은 기존의 틀을 깨는 도발적인 힘을 지니고, 그 자체로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그렇다. 터부시 되는 것들을 다시금 의식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투쟁을 계속해서 해야 한다. 그래서 인류는 발전한다. 이 작품은 무엇이 ‘불편한’ 것인지, 무엇이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인지를 묻고, 그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 않으면서도 강력한 반응을 이끌어낸다. 이는 우리가 통상적으로 당연하게 여기는 정상성을 문제 삼고, 주체와 객체, 규범과 그 너머를 재조명하게 만든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 작가들이 이러한 소재를 통해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단순한 트렌드가 아니라, 현재의 문화적 흐름 속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현상이다. 그만큼 예술은 시대를 반영하고,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기반으로 변화하는 생명력을 지닌다. 그렇다면, 나 역시 이러한 작업을 시도해 볼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소리 없는 미소가 입가에 만들어졌다. 이 웃음 속에는 그 어떤 불안정성과 유혹이 섞여 있다. 내가 이 작업을 “트라이해볼 수 있다”는 생각은, 단지 미적 실험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경계를 시험하는 행위로써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예술은 항상 기존의 규범을 넘어설 때 비로소 새로운 질문을 던지며, 그 자체로 존재의 의미를 확장한다.


루치오 폰타나의 “기다림 (Spatial Concept - Waiting, 1960)”이라는 칼로 날카롭게 찢긴 캔버스 작품은 당시의 작품으로서는 충격적이었을 것이다. 미색 캔버스의 표면엔 기본 베이스 칠도 없이, 날카로운 절개만 남았다. 물론 창작자의 고통을 느끼게 하는 일면도 있었다. 그리고, 단순한 평면을 넘어, 그 뒤를 상상하게 만드는 하나의 틈. 그 틈은 파괴가 아니라 가능성이었다. 예술이란 결국 경계를 허무는 것이 아닐까? 어쩌면 나도 틈을 좋아한다는 생각을 했다. 틈이 보여주는 것은 의미의 확장이 방대할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이고, 그 틈새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결국 창작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파괴는 늘 창조를 부른다. 어떤 것을 파괴해야 할까? 현대미술은 헤겔이나 니체 이후로 파괴만 남은 것인가? 테이트 모던에서 본 파괴와 틈, 해체와 재구성의 작품들을 통해, 현대 예술이 더 이상 하나의 완결된 서사를 전달하지 않고, 파편적 조각들로 구성된 새로운 서사를 제시한다고 판단했다.


전시장을 나서며 템즈 강변으로 발길을 돌렸다. 흐린 하늘 아래, 수만 년을 흐른 강물이 오늘 밤엔 화려하게 흐르고 있었다.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조명을 거울로 비추듯 반짝이는 강의 흐름은 묘한 아름다움을 주었다. 밀레니엄 브리지를 걸으며 도시의 숨결을 온전히 느꼈다.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배꼽처럼, 서로를 비추는 미러 룸처럼, 산산이 부서져 다시 비치는 파괴처럼.


밀레니엄 브리지는 한 치의 오차 없이, 정직하게 방향의 꾸밈없이 세인트 폴 대성당으로 이어진다. 멀리 성당이 가까워졌다. 어둠 속에서도 위엄을 잃지 않는 그 모습은 아름다웠다. 성당 앞에서 잠시 멈춰 섰다. 둥근 돔 위로 흐릿한 런던 빛이 내려앉고, 성당 앞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낮은 키로 반짝이고 있었다. 이 순간이 기억 속에 머물길 바랐다. 런던의 겨울밤은 습기 가득한 지하실같이 차가웠지만, 그 속에는 묘한 따스함이 깃들어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며 테이트 모던 근처의 작은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따뜻한 음식과 함께 몸속까지 스며든 감동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런던의 밤거리는 의외로 조용했고, 천천히 숙소로 향했다. 밀레니엄 브리지를 걸었던 순간이 다시 떠올랐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다리를 걸어가며, 도시에 스며들고, 도시가 내 안으로 흘러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차갑지만 따뜻하고, 고요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런던이 내 안에서 천천히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테이트 모던


거대한 심장의 판막을 열었다 과거의 피가 배인 붉은 벽돌 그 안엔 시간이 흘러도 멈춘 세계 공간은 공기는 무게를 가졌고 빛은 흐름을 잃었다 높이 매달린 천의 흔들림 멈춘 듯 그러나 흐르는 갈색의 시간 흔적의 언어 그 아래에서 과거를 걸었다 돌이킬 수 없는 폐허를 지나 무너진 선과 면을 쫓았다 한겨울 얼어붙은 몸 위로 형태가 된 고통 배설된 집념이 새긴 조각 질문이 번졌다 예술은 드러냄 인가 창조인가 배꼽을 확대한 액자 속 잊힌 연결 끊어진 흔적 이어 줄 것들은 홀로 두는 것들 빛과 어둠이 중첩된 영상 속에서 흐름이 되었다 서사의 일부가 되어 겹쳐진 기억을 쌓아 올렸다 단순함 속의 강렬함 그것이 곧 가장 깊은 울림 날카로운 칼날이 찢은 캔버스 그 틈이 말을 건넸다 파괴는 곧 창조 허물어진 경계 너머 새로운 세계가 숨 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