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은 크리스마스 이브로 칠해라

PINK

by 원성진 화가

2024/12/24/07:00

크리스마스 이브의 런던은 여전히 흐린 겨울 하늘 아래 고요히 숨 쉬고 있었다. 새벽 공기가 차갑게 스쳤지만, 설렘을 안고 시내로 향할 채비를 마쳤다. 그러나 주택가 좁은 골목에 하필이면 차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앞길을 막고 있는 차가 문제였다. 주택가의 조용한 새벽 정적을 깨뜨리는 것이 오랜 시간 망설여졌지만, 오늘은 차를 가지고 시내로 가야 하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이 경적을 울렸다. 경적이 울린 후, 졸린 눈을 비비며 내려온 차량 주인이 차를 이동시켰다. 시동을 걸고 크리스마스 이브의 런던 속으로 들어섰다. 런던의 새벽은 언제나 조금 ‘무대 같다’. 사람들은 각자의 아침을 연기하고, 거리의 침묵조차 하나의 장면처럼 느껴진다. 경적은 대본에 없는 소리였고, 그 순간 나는 스스로가 관객인지, 배우인지 헷갈렸다.


임페리얼 칼리지 앞 길가에 차를 세우고, 하이드 파크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겨울의 아침 공원은 마치 고요한 동화 속 한 장면 같았다. 서늘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나가고, 잔디 위에는 엷은 안개가 내려앉아 공원의 풍경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발 밑에서는 이슬 머금은 낙엽이 사각이며 부서졌고, 머리 위에서는 새들이 낮게 날아올랐다. 그저 이 모든 것을 가만히 바라보며 숨을 골랐다. 안개는 현실의 표면을 두껍게 만드는 장치다. 모든 사물은 그 속에서 스스로의 윤곽을 잃으며, 대신 이미지가 된다. 나는 그 이미지 속을 걷고 있었다. 마치 오래된 사진 속을 천천히 걷는 사람처럼.


공원 입구를 들어서며 왼편으로 시선을 돌리자, 빅토리아 여왕의 깊은 사랑과 애도의 마음이 깃든 알버트 메모리얼이 보였다. 금빛으로 빛나는 첨탑과 정교한 조각이 장엄하게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고, 그 위에 앉아 있는 알버트 공의 조각상은 마치 시대를 초월해 우리를 바라보는 듯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편을 향한 사랑을 이토록 장엄한 형태로 남겼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어떻게 여왕의 핑크 빛 사랑은 시간의 흐름을 넘어 이렇게도 영원할 수 있는 것일까? E.H. 카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끝없는 대화"라고 그의 저서에서 말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남긴 이 기념비는 그 대화의 증거였다. 여왕의 사랑은,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그 흔적을 남기고 현재의 영국에 질문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랑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남아 있는 것은 그 모형뿐이다. 런던은 이런 모형들로 이루어진 도시다. 감정의 원본은 사라지고, 그 복제품들이 시간을 대신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복제품이, 이토록 진실해 보인다.


조금 더 걸음을 옮기니 다이애나 메모리얼이 있는 연못이 나타났다. 그곳은 다이애나비를 추모하기 위해 조성된 공간으로, 소박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잔잔한 호숫가를 따라 걷는 이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물가에 앉아 있는 연인들은 조용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었고,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미소를 지었다. 아주 큰 말을 탄 사람들이 여유롭게 공원을 가로지르는 모습은 마치 과거 빅토리아 시대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순간, 나도 그 시대 속 귀족이라도 된 듯한 모습으로 말을 타고 시원하게 달리며 사냥을 하고 싶었다. 몸무게를 많이 줄여야 가능하지만, 승마는 나의 로망이다. 이 도시는 ‘시간의 리허설’을 끝없이 반복한다. 다이애나의 죽음조차 하나의 상징으로, 알버트의 사랑조차 하나의 기념으로 재생된다.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기억의 파편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시뮬라크르의 정원이다.


라운드 폰드에서는 백조와 오리, 거위들이 유유히 물살을 가르며 떠다니고 있었다. 물 위에 투영된 흐린 겨울 하늘과 새들의 부드러운 움직임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보였다. 사람들을 무서워하지 않는 새들은 그 주위를 맴돌며 천천히 다가왔다. 그 옆에서 목줄 없이 뛰어다니는 강아지들은 서로 사냥하듯 장난치기도 하지만, 새들을 쫓거나 괴롭히지는 않는다. 다람쥐들은 잔디밭을 바삐 가로지르며 나뭇가지 위를 타고 오르내렸고, 한 노신사는 모자 위에 새 모이를 놓고 걸으며 새들을 불러 모았다. 하이드파크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살아 있는 하나의 거대한 예술 작품 같았다. 하지만 ‘공존’이라는 말도 어쩌면 착각일지 모른다. 이 자연은 연출된 평화이고, 사람들은 그 평화의 장면을 소비한다. 나는 그 소비 속을 걷는 관찰자였다. 살아 있는 이미지들 사이를 유영하는 카메라처럼.


캔싱턴 궁전 앞을 지나, 다이애나 메모리얼 가든을 오른쪽으로 두고 우리는 공원을 빠져나왔다. 도로 건너편으로는 빅토리아 시대의 상징적인 콘서트홀, 로열 앨버트 홀이 우뚝 서 있었다. 그 붉은 벽돌과 둥근 돔은 오래된 기억 속 오페라와 연주회의 잔향을 담고 있는 듯했다. 길게 늘어선 입장 줄을 보며, 오늘도 누군가 아름다운 선율을 연주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계절이 바뀌어도, 시간이 흘러도, 이곳에서 음악은 여전히 울려 퍼질 것이다. 그러나 이 울림조차, 어쩌면 기록된 메아리일지도 모른다. 음악은 끝났고, 잔향만이 남아 도시를 순환한다. 런던은 끊임없이 자신을 되풀이하며, 그 되풀이 속에서 새로워진다.


하이드 파크는 1637년 헨리 8세가 사냥터로 사용했던 이곳은 점차 시민들에게 개방되었고, 이제는 역사를 품은 공간이 되었다. 알버트 메모리얼과 다이애나 메모리얼, 그리고 라운드 폰드의 새들까지, 모든 것이 시간을 품고 있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순간들이 어우러지는 이곳에서, 세월이 흐르는 방식을 새삼 느꼈다. 시간은 직선이 아니라, 이 도시에서는 하나의 순환 구조다. 역사는 기록이 아니라 재생의 기술이다. 런던은 그 기술을 가장 오래 연습한 도시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하이드파크는 화려한 장식과 반짝이는 불빛이 없어도 그 자체로 깊고 신비로운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바람이 나뭇가지 사이를 스치며 겨울의 노래를 부르고, 호수 위로 퍼지는 새들의 날갯짓이 작은 물결을 일렁이게 만들었다. 사람과 자연, 그리고 역사가 조화롭게 섞여 있는 그곳에서 나는 마음속 깊은 평온을 느꼈다. 따스한 커피 한 잔 없이도, 크리스마스 캐럴 없이도, 하이드파크는 그날 아침 가장 완벽한 크리스마스 이브의 풍경을 선물해 주었다. 이 평온함도 실재라기보다 이미지의 완성이다. 런던의 크리스마스는 ‘축제’가 아니라 ‘축제의 형상’을 살아간다. 그래서 더 아름답다. 복제된 감정은 때로 원본보다 순수하다.


차가운 아침 공기를 가르며 걸었던 그 시간이, 그날의 작은 순간들이, 아마도 내 기억 속 오래도록 부드러운 온기로 남아 있을 것이다. 12월의 런던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도 생기가 넘쳤다.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도시의 불빛은 반짝였고, 크리스마스를 앞둔 거리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현실이란, 이렇게 반짝이는 순간들의 총합일까? 아니면 반짝임을 기억하는 마음의 작용일까? 런던은 이 두 가지의 경계를 무너뜨리며, 나를 그 사이에 세운다.


하이드파크의 고요한 산책을 마치고 차에 올라 버킹엄 궁전을 향해 달렸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런던의 거리에는 홀리데이 특유의 온기가 감돌았다. 가로수에는 은빛 전구가 촘촘히 엮여 있었고, 상점마다 화려한 장식과 크리스마스 트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따뜻한 음료를 손에 든 사람들이 분주히 거리를 오가며 겨울의 낭만을 즐기고 있었다.


버킹엄 궁전에 가까워질수록 광장 한가운데 자리한 웅장한 건축물과 마주했다. 1703년에 세워진 이 궁전은 세월을 넘어 여전히 그 위엄을 자랑하고 있었다. 정문 위에 펄럭이는 왕실 깃발은 여왕이 궁전에 머물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고, 근위병들은 관광객들의 카메라 앞에서도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 있었다. 저 멀리서 행진하는 한 무리 기마경찰의 모습과 광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웅성거림이 어우러져, 이곳은 여전히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버킹엄 궁전은 ‘권력의 현실’이라기보다 ‘권력의 이미지’다. 깃발은 존재를 상징하지만, 그 상징이 곧 존재가 된다. 보드리야르가 말했듯, 기호는 이제 더 이상 무언가를 대표하지 않고, 그 자체로 실재가 된다.


궁전을 지나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향했다. 수백 년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이곳은 영국 왕실의 대관식과 위대한 인물들의 안식처로 자리한 장소였다. 고딕 양식의 건물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있었고, 섬세한 조각과 창문은 마치 오래된 성가를 들려주듯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사원의 문을 통과하며, 이곳을 지나간 수많은 왕과 여왕, 그리고 역사의 거장들을 떠올렸다. 바닥을 디딜 때마다 시간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현실은 무게감이 없는데, 이곳의 시간만큼은 묘하게 묵직했다. 그러나 그 무게 또한 재현된 것일지도 모른다. 돌로 된 경건함의 복제.


공원을 거처 거리를 걷다 보니, 빅벤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1859년에 완공된 이 시계탑은 런던을 상징하는 가장 유명한 건축물이었다. 최근 보수 공사를 마쳐 더욱 빛나는 청동 시계판과 정교한 장식이 저녁 햇살을 받아 황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강을 따라 이어지는 길을 걸으며, 빅벤이 지켜본 런던의 수많은 계절과 시간들을 떠올렸다. 그 옆으로 흐르는 템즈 강은 마치 묵묵한 역사 속 증인인 듯, 아닌 듯 모른 채 차분히 흐르고 있었다.


템즈 강을 건너는 웨스트민스터 다리를 지나며 바라본 강가의 풍경은 직접 봐야 알 수 있다. 바람이 강물 위를 스치며 작은 물결을 만들었고, 저 멀리 런던아이가 느릿한 회전을 하며 도시의 전경을 담아내고 있었다. 런던에서 꼭 한 번 타보고 싶었지만, 예약이 끝난 상황이라 마음을 접었다. 강변을 따라 걷는 사람들, 거리에 늘어선 노점상들, 사랑을 속삭이며 손을 맞잡은 연인들까지, 이 모든 장면이 어우러져 겨울의 런던을 더욱 로맨틱하게 만들고 있었다. 런던아이는 도시를 바라보는 ‘눈’이라기보다, 도시가 스스로를 감상하는 거울이다. 현실은 더 이상 바깥에 있지 않다. 도시가 자신을 소비하는 방식이 곧 현실이다.


이어 세인트 제임스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이곳은 1603년부터 왕실 정원으로 조성된 런던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었다. 겨울 나뭇가지 사이로 내리는 아슴한 밝음이 공원의 산책로를 감싸 안았다. 가벼운 안개가 공원의 풍경을 한층 더 신비롭게 만들었고, 길을 따라 산책하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잔잔한 음악처럼 들려왔다. 자연과 도시가 조화롭게 어우러진 이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지는 순간이었다. 현실의 따뜻함은 공기의 온도가 아니라, 그 온도를 기억하는 마음의 재현이다. 나는 실제의 추위 속에서 ‘따뜻함의 이미지’를 느꼈다.


런던의 중심을 떠나, 노팅힐로 이동했다. 주변의 도시의 풍경이 서서히 변했다.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의 건물들이 늘어선 이곳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아늑하고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작은 서점 앞에서 멈춰 서자,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책장들 사이로 희미한 조명이 비치고 있었다. 서점 안에는 여행객들이 분주히 책을 넘기고 있었고, 커피 향이 공기 중에 은은하게 퍼지고 있었다. 근처 매장들을 기웃거리며 한동안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노팅힐은 영화 속 장면이 먼저 떠오르는 상징의 공간이다. 우리는 그 영화를 기억하기 때문에 이 거리를 ‘아름답다’고 느낀다. 현실보다 이미지가 먼저 와버린 세계.


마을 안쪽의 포토벨로 로드 마켓은 더욱 활기찼다. 길거리에는 골동품과 빈티지 소품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가득했고, 길모퉁이에서는 먹거리 자판이 있었다. 손으로 만든 장신구를 파는 상인의 밝은 미소, 크리스마스 캐럴은 이브니까 더 아름답게 들렸다. 그리고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진 모습은 축제에 참석한 기분을 들게 했다. 이곳은 런던의 또 다른 개성과 따뜻한 에너지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밤이 깊어 갈 때 소호로 향했다. 좁은 골목마다 작은 바와 레스토랑이 불빛을 밝히고 있었고, 거리 위를 가로지르는 반짝이는 조명들이 축제의 분위기를 한껏 살리고 있었다. 다양한 장르의 음악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왔고, 젊은이들의 웃음소리가 크리스마스의 밤공기 속으로 번져 나갔다. 거리의 낙엽조차 리듬에 맞춰 흔들리는 듯했다.


런던의 거리는 늦은 밤에도 활기를 잃지 않았다. 크리스마스 이브의 런던은 화려한 조명과 함께 빛나고 있었다. 차창 너머로 스쳐가는 풍경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느꼈다. 이 도시가 품고 있는 낭만과 시간, 역사와 현재, 그리고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얼마나 아름답게 뒤섞여 있는지를. 런던은 실재와 모사의 경계를 끊임없이 교란시킨다. 그러나 그 교란이야말로 삶의 본질에 가깝다. 현실은 완벽히 믿을 수 없을 때 가장 생생해진다.


이 모든 장면들이 내 마음속에 ‘핑크빛’으로 덧칠된다. 따뜻하고, 쓸쓸하고, 낭만적이며, 조금은 거짓 같은 그 빛으로.



하이드파크의 겨울


안개의 결 대로 기억이 흐르면

흐린 하늘 아래, 시간은 숨죽이고

잔잔한 물결이 그리움을 품으면

금빛 첨탑은 사랑을 새긴다.


날개 짓에 떨리는 호수

오래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는

시간 속으로 사라졌다.


사람은 순간을 살아가고

바람은 지나간 시대를 노래한다.

빛나는 장식 없이도

이 아침은 완전하다.


겨울의 노래는

소리 없이 깊이 울린다.

시간의 노래는

들리지 않는다.




겨울의 런던에서


역사가 지나가는 순간

황금빛 첨탑 아래,

여왕의 깃발은 바람을 타고

한 시대의 노래는 사원의 벽에 스며들고


안갯속에 머무는 순간

궁전은 어제와 오늘을 품고 서며,

이름 없는 그림자가 바닥을 지나간다.

근위병은 흐트러지지 않는 순간을 지킨다.


종이 울리고, 시계는 멈추지 않으며

길거리 악사는 풍요로운 저녁을 꿈꾸고

지나는 사람들은 크리스마스를 꿈꾸고

책장 속 문장은 추억을 이야기하고


빛나는 순간은 기억 속에

런던은 깨어 있다.

밤이 깊어도,

기억은 반짝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