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을 달리는 색은 빠르게 변한다

APPLE GREEN

by 원성진 화가

2024/12/25/02:00


새벽 2시. 도둑고양이처럼 숙소를 아주 조용히 빠져나왔다. 새벽의 런던은 마치 꿈결 같았다. 도시의 불빛은 하나 둘 희미해졌고, 옅은 안갯속에서 가로등의 불빛이 부드러운 녹색 빛을 머금었다. 서늘한 공기가 와닿으며 여행의 긴장을 실감하게 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묘한 설렘이 차올랐다. 창가에 맺힌 물방울 너머로 런던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담았다. 어제는 크리스마스이브, 도심은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반짝이는 장식과 캐럴이 어우러져 낭만적인 겨울밤을 선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정적이 흐르고, 도시도 나도 조용히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기술 문명의 불빛은 잠들고, 감각의 세계가 깨어난다. 도시의 전류가 꺼진 새벽, 인간은 다시 ‘몸의 매체’가 된다. APPLE GREEN 그것은 차가운 기술과 따뜻한 생명의 중간 지대에서 깜박이는 색이다.


조심스레 차에 올라 엔진을 켜자, 부드럽게 깨어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반대 방향의 운전이 익숙하지 않았지만, 아무도 없는 도심을 천천히 빠져나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존재가 눈앞에 나타났다. 길가 한쪽, 여우 한 마리가 조용히 모습을 드러냈다. 가느다란 몸매와 날렵한 털빛, 호기심 가득한 눈빛, 긴 꼬리가 새벽빛 속에서 은은하게 빛났다. 런던 시내에서 마주하니 신비로운 느낌이 들었다. 여우는 잠시 이쪽을 응시하더니 조용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마치 나에게 새로운 여정의 시작을 축복이라도 하듯이. 도시의 생명선에서 튀어나온 하나의 ‘신호’. 여우는 문명의 경계 밖에서 온 메시지였다. 기술의 매끄러운 질감 속을 가로질러, 자연의 감각이 한순간 되살아난다. 나는 인간과 기계, 도시와 숲의 접속점에 서 있었다.

런던을 뒤로하고 포크스톤으로 향하는 길. 새벽의 고속도로는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깊은 안개가 낮게 깔려 길을 감싸 안았고, 헤드라이트의 빛은 흐릿한 초록빛으로 퍼져 나갔다. 도로 위를 떠다니는 듯한 안개가 마치 현실과 꿈의 경계를 흐려놓는 것만 같았다. 차 안은 고요했고, 오직 엔진 소리만이 일정한 리듬으로 들렸다. 긴장감과 설렘이 교차하며, 나의 시선은 길 위에 고정되었다. 앞차의 후미 등조차 보이지 않는 순간들이 이어졌고, 오직 감각에 의지한 채 핸들을 잡고 나아갔다. 끝없이 펼쳐진 도로는 마치 무한한 공간으로 이어지는 듯했다.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날카로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맥루언이 말했듯, 도로는 하나의 ‘매체’다. 그 위를 달리는 자동차는 인간의 신경망이며, 나는 지금 그 신경의 한 구석에서 전류처럼 움직이고 있었다. 감각은 확장되고, 동시에 마비된다. 기술의 손끝에서, 인간은 점점 기계에 닮아간다.


포크스톤 유로터널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또 다른 긴장이 시작 됐다. 이제 곧 영국을 떠나 프랑스로 가기 위한 예정된 절차들이 있다. 그러나 그 순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게이트에서 예약된 티켓이 유효하지 않다는 통보를 받았다. 머릿속이 순간 하얘졌다. 내 차 뒤로 차량들이 길게 줄지어 있었고, 하나둘씩 다른 게이트로 비켜가는 모습이 더욱 초조함을 불러일으켰다. 급히 비상벨을 눌러 직원이 오기를 기다렸다. 차가운 공기가 내 손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기다리는 동안 숨을 가다듬으며 상황을 정리했다. 마침내 새로운 티켓을 확보하고 통과할 수 있었지만, 이미 많은 시간을 소모한 후였다. 문명은 늘 효율을 약속하지만, 그 약속은 언제나 불완전하다. 기술의 오류는 단순한 불편이 아니라, 우리가 기계에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국경 심사를 받던 중, 예상치 못한 검문이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시즌의 테러 위협 때문이라는 설명이 이어졌다. 내 차량은 스캐너를 통과해야 했고, 트렁크까지 철저히 검사받아야 했다. 심사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차량 내부를 살폈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긴장감이 배가 되었다. 나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차분하게 대응했지만, 검문이 길어질수록 초조함이 커졌다. 옅은 붉은색 경광등 불빛이 차량 안으로 스며들며 공간을 채웠고, 그 속에서 나는 숨을 골랐다. 사실 긴장할 필요도 없는데,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 경광등 불빛의 색이 기억나지 않는다. 결국 검문이 끝나고, 나는 다시 차를 몰아 유로터널로 향했다.


기차에 차량을 실은 후, 드디어 긴장이 풀렸다. 목적지는 프랑스 칼레. 어둠이 짙게 깔린 터널 속에서 기차는 조용히 움직였고, 차 안은 평온함이 감돌았다. 어둠 속을 지나며 나는 창밖을 응시했다. 빛 한 점 없는 공간 속에서 시간의 개념조차 희미해졌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아직도 남아 있는 불안감이 자리하고 있었다. 조금 전의 검문과 티켓 문제로 인해 불편함이 가시지 않았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들어 예약 문제를 확인하고, 환불 요청 메일을 작성했다. 크리스마스 휴일에도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클레임을 시도했지만, 대부분의 연락 수단이 닫혀 있었다. 결국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마친 후, 눈을 감고 잠시나마 마음을 진정시키려 했다. 그러다 잠이 들었다.


터널이 끝나갈 무렵, 다시 눈을 떴다. 차창 밖으로 희미한 불빛들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은 프랑스 칼레의 새벽빛이었다. 런던을 떠나온 지 몇 시간 만에, 나는 새로운 땅에 도착했다. APPLE GREEN은 이동의 색이다. 그 빛은 변주하며 공간을 넘고, 나는 그 색의 진동 속에서 또 하나의 나로 재조립되고 있었다. 차를 몰아 기차에서 내려오자, 깨끗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며 새로운 공기의 향기를 전했다. 이제 다시 시작이다.


새로운 대륙, 새로운 길, 그리고 새로운 이야기. 그렇게 나는 크리스마스의 밤을 넘어 또 다른 세계로의 첫 발을 내디뎠다. 여정은 계속된다. 마치 새벽의 여우처럼, 낯선 길을 조용히 탐험하며. 그래도 지금부터는 내가 만들어 낼 수 있다. 섬이 아닌, 대륙이 가지는 한계는 내가 넘을 수 있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혹여나, 신이 파놓은 함정이 있다면 피하지 않고 빠져 들겠다.


칼레로 돌아왔다.

고속도로를 따라 내달리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칼레의 풍경은, 처음 도착한 날의 밤과는 느낌이 달랐다. 아침이 오는 칼레는, 점차 시골과 도시 외곽의 모습이 드러났다. 칼칼한 공기 속에서도 그 풍경은 묘한 고요함과 깊은 정취를 품고 있었다. 드넓은 평야는 끝없이 펼쳐진 바다처럼 시야를 채우고, 간간이 보이는 나무들과 소박한 농가들이 풍경 속에서 점을 찍듯 자리하고 있었다. 대륙의 도로는 마치 거대한 회로처럼 이어져 있다. 그 위를 달리는 인간은 신호이자 데이터, 세계는 더 이상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연결된 네트워크다. 멀리 보이는 교회의 첨탑은 유럽 특유의 고풍스러운 정서를 더했다. 이 평온함과 APPLE GREEN 색감들 속에서 나는 다시금 유럽 대륙이 지닌 고유한 매력을 느꼈다.


도로는 긴 호흡으로 뻗어 있었다. 드문드문 스쳐 지나가는 소형차와 대형 트럭이 있었지만, 고속도로의 넓은 차선은 한결 여유로웠다. 한적한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잔과 바삭한 크루아상으로 몸을 녹였다. 졸음을 쫓기 위해 에너지 드링크를 마시기도 했고, 때로는 설탕을 듬뿍 넣은 에스프레소로 기운을 북돋웠다. 이른 아침 시간, 밤새워 달리고 있는 듯한 고속도로 위의 차량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쉴 새 없이 계속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색적인 풍광은 단조롭게 이어지는 풍경으로 보이고, 끝없이 펼쳐진 도로는 마치 끝없는 반복처럼 느껴졌다. 핸들을 쥔 손은 점점 뻣뻣해졌고, 장시간 운전에 지친 몸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하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속에는 묘한 기대감이 다시 자리 잡았다. 이 긴 여정의 끝에는 로마가 있다. 물론 내일도 또 달려야 하겠지만, 눈 덮인 알프스의 웅장함, 지중해의 눈부신 반짝임, 그리고 영원의 도시, 로마의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


프랑스 교외의 고속도로 풍경은 유럽의 겨울을 그대로 담고 있었다. 차창 밖으로 스치는 들판, 형형색색의 지붕 아래 조용히 잠든 작은 마을들이 간헐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회색 구름이 하늘을 가득 덮고 있었지만, 그 아래 펼쳐진 풍경은 고요하고도 우아했다. 나는 속도를 유지하며 이 광활한 대륙의 일부가 되어 달리고 있었다. 그렇게 프랑스의 중심부를 향해 나아가며, 겨울의 유럽 속으로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다.


리옹에 도착한 것은 늦은 오후였다. 겨울의 해는 회색 빛으로 멈췄고, 도시는 말이 없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도심은 예상과 달리 놀랍도록 차분했다. 그 적막함 속에서 나는 긴 여정을 견뎌온 몸과 마음의 피로를 새삼 실감했다. 하지만 대륙을 달리며, 차 안에서 새로운 방문 계획을 세웠다. 바로 헤르메스 매장에 입장하는 것, 그것도 가능한 한 우아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가방을 사야 하니까. 차를 신중하게 주차했다. 리옹 도심에서 부주의하게 주차했다 가는 금세 범칙금 딱지를 받을 것만 같았다.

서둘러 차의 뒷좌석에서 미리 준비한 옷을 꺼내 입었다. 일행은 파리에서 산 샤넬 구두에 드레스와 코트를 갖춰 입었고, 나는 피렌체에서 구입한 코트를 걸쳤다. 고풍스러운 도시의 거리 속에서 유리에 비친 우리의 모습은 고급스럽게 보였다. 세련된 건축물들이 배경음악을 깔아줄 것만 같았고, 차가운 공기는 나른했던 감각을 서서히 깨웠다.

그러나 여행이란 언제나 계획대로만 흘러가지 않는 법. 헤르메스 매장 앞에 도착했을 때, 나는 뭔가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다. 매장 내부는 불빛으로 환했지만, 커다란 유리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보통 문 앞에는 휴점을 알리는 작은 표지판이라도 있을 법한데, 이곳에는 오직 차가운 유리문만이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한동안 멍하니 내부를 바라보았다. 기대했던 매장은 물론, 그날의 리옹 전체가 마치 겨울잠에 빠진 듯 고요했다. 거리에서 마주친 몇몇 사람들조차 마치 유령처럼 발소리 없이 스쳐 지나갔다.

한참 동안 문 닫힌 헤르메스 매장을 배경으로 서 있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밤공기 속에서, 일행의 발을 감싸던 샤넬 구두와 지나치게 차분한 리옹의 분위기가 갑자기 우스꽝스럽게 느껴졌다. 나지막한 탄식이 새어 나왔다. 그래도 함께였기에 우리는 웃을 수 있었다. 이후 어렵게 찾아간 한인 식료품점조차 휴점이었고, 결국 우리는 리옹 도심에서 완전히 허탕을 친 채 차에 올랐다. 그렇게 다시 샹베리를 향해 고속도로를 따라 달렸다. 우리가 쫓던 화려한 빛은 닿지 못한 채 저물었지만, 여행의 가장 소중한 순간은 늘 예상치 못한 곳에서 찾아온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샹베리에 가까워질수록 알프스의 실루엣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희미한 그림자처럼 아득한 수평선 위에 떠 있었지만, 점차 다가올수록 그 웅장한 존재감이 온몸을 압도했다. 마치 태곳적부터 그 자리에 자리 잡은 거대한 신이 조용히 나를 내려다보는 듯한 느낌. 산맥은 하늘을 가르며 대지를 짓누르고, 차가운 겨울 공기 속에서 묵직한 아우라를 뿜어냈다.

긴 터널을 몇 개 지나자 저녁 어스름이 산을 감싸기 시작했다. 어둠이 서서히 깔리며 알프스의 그림자는 더욱 깊고 짙어졌다. 도로 위 희미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창밖의 풍경은 차츰 사라지고 오직 검은 실루엣만이 남아 있었다. 그 깊은 적막 속에서 산맥은 더없이 고요한 존재로 남아, 마치 이곳을 지배하는 절대적인 힘처럼 보였다. 나는 인간이 감히 넘을 수 없는 경계를 마주한 듯한 경외감을 느꼈다. 자연과 인간의 한계를 이해하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산을 보며 자신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를 실감하며, 아마도 인간이 자연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가? 그러나 그런 무력함 속에서도 인간이 삶을 계속 추구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지닌다.


샹베리의 숙소에 도착한 후에도 알프스는 내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낡은 창문 너머로 보이는 산의 윤곽은 어둠 속에서도 또렷했다. 그 광활한 형체는 숨죽인 채 나를 내려다보았고, 한순간 숙소 전체를 집어삼킬 것만 같은 기묘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적막은 무겁고 날카로웠다. 호흡조차 조심스러워지는 순간,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의 웅장함에 눌린 내 마음도 점점 더 얼어붙는 듯했다. 조심스럽게 길가에 주차를 했다.


이곳의 숙소는 시간이 멈춘 듯 오래된 3층 건물이었다. 돌로 지어진 외벽은 세월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듯 거칠었고, 안으로 들어서자 삐걱이는 나무 바닥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문틀은 뒤틀려 있었고, 주방은 오랜 시간 방치된 흔적이 역력했다. 식기 세척기 안에는 씻기지 않은 그릇들이 뒤엉켜 있었고, 싱크대 위로는 녹슨 물때가 내려앉아 있었다. 식탁 위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마치 시간이 그 위에 수북이 쌓인 듯했다.

방 안은 더욱 황량했다. 먼지 쌓인 낡은 가구들과 구석에 기울어진 서랍장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멈춰 있었다. 침대는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약해 보였고, 색 바랜 담요는 더 이상 온기를 품지 못한 듯 서늘하기만 했다. 벽에는 오래된 균열이 얕게 퍼져 있었고, 창문 틈새로는 차가운 밤공기가 스며들었다. 손을 뻗어보면 모든 것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아! 참을 수 없는 불편함.

마지못해 침대에 몸을 뉘었다. 차디찬 매트리스가 등을 타고 올라오는 순간, 온몸이 저릿해졌다. 눈을 감아보려 했지만, 귓가를 맴도는 소음들이 끊임없이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계단을 오르는 듯한 삐걱댐, 바람이 창문 틈새를 파고드는 소리, 정체를 알 수 없는 낮은 진동들. 건물 전체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호흡하고 있는 듯했다. 낯선 공간의 거친 침묵은 단순한 소음 섞인 정적이 아니라, 나를 삼킬 듯한 날카로운 감각이었다.


결국 어둠 속에서 몸을 일으켰다. 방 안을 서성이며 다시 침대에 눕기를 반복했다. 창밖을 내다보니, 어두운 하늘 아래 알프스의 산줄기가 희미하게 솟아 있었다. 그 광경은 말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장엄했지만, 그 밤의 나는 그 장엄함조차 오롯이 느낄 여유가 없었다. 어색하고 불편한 침대에서 뒤척이다 결국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작은 화면 속 뉴스 기사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무언가처럼 보였다. 그러다 한 기사 제목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가까운 알프스 스키장에서 발생한 눈사태로 유명한 스포츠 선수가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 기사 속 그녀의 환한 미소와 드넓은 설원의 대비가 더없이 쓸쓸했다. 생의 마지막 순간, 그녀는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자연 앞에서, 거대한 산맥 앞에서, 한 인간이 얼마나 작고 나약한 존재인지. 하지만 그 나약함 속에서도 우리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한계를 뛰어넘으려 애쓰는 존재였다. 그녀 역시 그랬을 것이다.

휴대폰 화면을 덮자, 다시금 적막이 나를 감쌌다. 알프스는 여전히 창밖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자연과 인간, 생과 죽음의 경계에 선 듯한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공허함 속에서 서서히 잠에 들었다. 언제 잠들었을까?


새벽 2시였다. 이곳이 내게 준 가장 큰 선물은 어쩌면 불편함 속에서 나 자신을 직면하게 만든 경험일지도 몰랐다. 오래된 건물과 깊은 밤, 그리고 장엄한 자연 속에서 보낸 그 시간은 내가 세상과, 그리고 내 안의 고요와 마주할 수 있게 한 순간이었다. 나만이 안다.



새벽의 여정


안개는 도시를 지우고,

희미한 가로등 아래

길 위의 시간은 기억과 예감 사이에 머문다.


새벽빛은 나를 비추며 묻는다.

너는 떠날 준비가 되었는가?

여우의 눈빛이 스치고,


본능에 의지해

보이지 않는 길을 따라간다.

고요한 도로, 눈빛과 안개가 춤추는 공간


심해 터널을 거침없이 달리는 기차

시선을 막은 터널 속에서

불안과 평온이 교차한다.


알고 있다.

새벽은 늘,

새로운 여정을 품고 온다는 것을.




겨울의 길 위에서


나를 지나치는 바람과 시간.

애플 그린 들판 너머,

고요한 평야, 흐르는 길,

유럽의 겨울은 긴 숨을 쉰다.


뜨거운 에스프레소 한 모금,

향기의 흔적은

끝없는 도로 위를 흐른다.

여정은 멈추지 않고


반복되는 풍경 속에서

나는 나를 찾고, 길은 길을 찾고

끝없는 길 끝에

똑같은 풍경


달리는 바퀴 아래서

대륙의 잠든 대지가 일어나고

로마의 꿈이

아득히 빛나고 있었다.




리옹의 겨울


도시는 조용히 숨을 삼키는 회색 빛 저녁,

기대는 닫힌 유리문 앞에 서서

차가운 바람에 흔들린다.

샤넬 구두는 길을 잃고


여행은 도착이 아닌 발걸음 속에,

빛이 아닌 그림자 속에,

닫힌 문 너머의 깨달음 속에.

계획의 틈 사이로 바람이 들어온다.



알프스의 밤


태곳적부터 이어진 거대한 숨결이

거역할 수 없는 무게로 다가온다.

어둠 속에서, 산은 침묵으로 나를 내려다본다.


침묵은 선명한 모서리가 되어

나의 고요를 거칠게 두드린다.

낡은 방은 낮은 신음으로 울고,


산은 더 말이 없고,

나는 더 작아지고,

우리는 서로를 바라본다.


인간은 머물다 가는 흔적일 뿐.

그러나 그 순간에도,

무언가를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