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PY RED
2024/12/28/08:00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하던 날이었다. 아침 햇살이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던 그날, 먼저 피렌체 더 몰 아울렛으로 향하기로 했다. 이날은 조금 서둘러 출발했다. 로마로 가는 여정을 준비하며 마음 한편에는 설렘이 가득했다. 지난 모든 여정의 끝이 어쩌면 로마인지도 모른다.
더 몰 아울렛으로 가는 길목, 도로 옆에 자리 잡은 작은 간이식당이 눈에 띄었다. 목재로 된 간판과 은은한 연기가 풍기는 곳에서 우리는 잠시 멈추기로 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메뉴를 훑어보던 중, 특별히 소 위로 만든 햄버거를 주문했다.
평소에 먹던 햄버거와는 사뭇 다른 풍미가 입안을 가득 채웠다. 부드럽고 깊은 맛이 이탈리아의 풍부한 음식 문화를 한껏 느끼게 해 주었다. 간단한 식사였지만 그 순간만큼은 이탈리아의 소박하고 진솔한 매력을 만끽할 수 있었다.
아울렛에 도착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의 생기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분주히 움직이는 이들의 모습과 곳곳에서 들려오는 대화 소리가 기분을 업 시켜주었다. 몰에 들어서자마자 눈길을 사로잡는 제품들이 빛을 발했다. 각기 다른 브랜드의 이름 아래 세련된 디자인과 완벽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진열장 속 상품들은 마치 전시된 예술품처럼 유혹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와는 거리가 먼 세계였다. 구매할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다. 단지 일행을 따라왔을 뿐, 필요하다면 의견을 주고 소소한 도움을 줄 뿐이었다.
그렇게 같이 매장들을 다니면서, 의미 없는 시선으로 옷들을 보며 시간을 보낼 때,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한 아이템이 나타났다. 그것은 바로 메종 마르지엘라의 블랙 코트였다. 평범한 코트와는 결이 달랐다. 마치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무대 의상 같기도 했고, 그렇지 않기도 하면서 묘하게 연출된 듯한 그 디자인은 한눈에 나를 사로잡았다.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실루엣, 섬세하게 떨어지는 어깨선, 그리고 소재 특유의 묵직하면서도 우아한 질감까지. 옷걸이에 걸려있는 그 코트는 움직이지 않아도 자신의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한번 입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팔을 끼워 넣는 순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옷은 단순히 입는 것이 아니라, 입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 했던가? 그 코트는 마치 나를 위해 만들어진 듯 내 몸에 딱 맞았다. 옷깃이 목아래로 가슴을 부드럽게 감싸고, 소매 끝은 손등을 완벽하게 스쳤다. 거울 속의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단순히 입은 옷 한 벌이 아니라, 그 옷이 나를 통해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다. 아니 내가 옷을 통해 살아 숨 쉬는 느낌이었다.
사실, 난 옷에는 많은 돈을 쓰지 않는다. 실용성과 가성비를 따지며 합리적인 선택을 선호하는 내가 이 코트를 입어보고 난 뒤, 무언가 가 확실히 달라졌다. 더 고민할 여지조차 없었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이미 그 코트를 계산대에 올려놓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쇼핑백을 든 채 매장을 나서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충동구매란 이렇게 다가오는 것이구나. 마음의 결정을 내리기 전에 본능이 먼저 선택을 끝내 버리는 순간. 하지만 그 순간의 선택은 후회와는 거리가 멀었다. 오늘부터 옷은, 나를 표현하고 내면의 자신감을 끌어올리는 도구가 되었다. 메종 마르지엘라의 코트를 걸친 나는 평범한 일상 속에서 잠시나마 무대 위에 선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그날의 경험에서 내가 잊고 지냈던 부분을 알아챘다. 옷 한 벌이 주는 설렘과 자신감, 그리고 그것을 통해 다시 발견하는 나 자신. 메종 마르지엘라의 블랙 코트는 같은 디자인 여러 장의 옷들 중에 하나가 아니라, 나에게 새로운 모습과 이야기를 선물해 준 예술이었다.
진정한 자유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아는 데서 나온다. 진정성 있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자신을 잘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의도나 계획을 넘어, 삶은 지금 이 순간의 선택과 진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의미는 내가 자의적으로 부여함으로 가부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과소비에 대한 변명이 너무 길었다.
점심은 아울렛 근처에 위치한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하기로 했다. 그곳은 ‘티본스테이크’로 이름난 곳이었다. 레스토랑의 문을 열자마자 고풍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다. 현지인들의 단골집인 듯했다. 따뜻한 나무 테이블과 클래식한 조명이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그리고 짙은 향신료 향이 코끝을 간질이며 입맛을 자극했다.
잠시 후, 주문한 티본스테이크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그 모습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완벽한 굽기의 고기는 빛깔부터 황홀했다. 칼을 대는 순간 느껴지는 부드러운 결, 한 입 베어 물었을 때 조금은 질겼지만, 퍼지는 육즙과 깊은 풍미는 정말로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동을 안겨주었다. 음식이 주는 행복이란 이런 것일까?
맛있게 식사를 마친 후, 우리는 다시 길을 나섰다. 두 손에 든 쇼핑백보다 마음속에 담긴 따스한 기억들이 더 소중하게 느껴졌다. 그 속에 담긴 작은 기쁨들이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주었다. 이래서 여행은 늘 새롭고 특별하다.
로마로 향하는 길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기대하며 출발했지만, 유럽 여행 내내 경험했던 도로 중 가장 붐비는 상황이었다. 차들이 뒤엉켜 움직이는 도로에서 위험한 순간도 있었고, 우리의 인내심이 시험받았지만, 이 또한 여행의 일부라는 생각에 미소를 잃지 않으려 했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여전히 아름다웠고, 그런 풍경이 답답함을 달래 주었다.
드디어 로마에 도착해 숙소에 짐을 풀고 나니 온몸이 피곤했지만, 우리는 근처 식료품점을 들르기로 했다. 로컬 마켓의 생동감과 신선한 식재료들이 아니라 아주 조그만 상점이었다. 그래도 좁은 상점 안에 없는 게 없어서 우리의 피곤함을 잠시 잊게 해 주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뜻밖의 만남이 있었다.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주인아저씨가 한국영화 오징어게임을 보고 계신 것이 아닌가! 화면 속에서 익숙한 배우들의 얼굴을 보니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아저씨와 대화를 나누며 한국 문화를 좋아하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순간, 우리가 한국에서 가져온 오징어 땅콩 과자가 떠올랐다. 감사의 의미로 한 봉지를 선물하니 아저씨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 미소는 그날 하루의 피로를 모두 잊게 해주는 따뜻한 위로였다.
인간의 삶에서 우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운명을 완전히 통제할 수 없지만, 우연한 만남을 통해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는 있다. 이처럼 우리의 삶이 우연적이고 예기치 않은 순간들 속에서 더욱 풍성해지고, 그 우연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진정한 삶의 지혜다.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간단히 맥주 한 잔을 즐겼다. 짙은 어둠이 깔린 로마의 밤, 창문을 열면 살짝 스며드는 시원한 바람이 완벽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피렌체에서의 간이식당, 더 몰 아울렛의 활기, 티본스테이크의 풍미, 그리고 로마에서의 따뜻한 인연까지. 모든 순간이 하나로 이어져 우리의 여행을 더욱 특별하게 만들어 주었다.
침대에 누워 로마의 밤하늘을 상상하며 눈을 감았다. 오늘의 추억이 내일로 이어지고, 내일의 여정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감으로 방안을 천천히 채워가며 잠을 청했다. 이탈리아의 시간은 그렇게 마음속에 아름다운 흔적으로 남아갔다.
아침 빛 따스한 날,
길 위의 바람이 지나면
피렌체의 끝자락에서,
로마를 향해 걷는다.
검은 코트, 한 겹의 굴레,
그 속에 숨어버린 나는,
거울 안의 나를 바라본다.
옷이 나를 선택했다.
티본스테이크 붉은 결 위로
칼끝이 지나가고,
입 안에 퍼지는 육향의 무게,
여행은 혀끝에서도 익어간다.
붐비는 도로, 흔들리는 창,
더딤조차 여행이 되고,
빛과 어둠 사이,
기억은 조용히 무늬를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