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처음에는 '낯선 만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0여 년 전 그러니까, 2013년 겨울 정도로 기억한다. 하루는 '어느 여행가의 강연'에 간 적이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혼자 여행을 하는 건 설렘과 낭만보다는 용기 있는 자들의 도전과도 같은 분위기가 있던 터라 그의 강연은 빈자리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빽빽하게 들어찼다.
그리고 강연이 끝난 후에 이어진 'Q&A 시간' 그중에서도 두 번째 질문을 했던 의기소침해 보이는 어느 여학생의 질문이 10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있는데 질문은 다음과 같았다.
"어떻게 하면 해외여행 가서 친구를 사귈 수 있어요?"
나는 대답을 할 자격이 없는 그녀와 다를 바 없는 청중임에도 불구하고, 대신 대답을 하고 싶어서 입이 근질거렸다. 소위 말해서 핵인싸 (요즘 말로는 '극 E 성향') 였던 나는 그 짧은 시간에도 희로애락으로 가득한 여행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마구잡이로 헤엄치는 중이었다 (그러나.. 난 대답을 해 줄 처지가 아니었다)
질문을 들은 강연자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나갔다. (참고로 그의 실제 직업은 초등학교 선생님인데 질문자가 최대한 상처받지 않도록 애쓰는 것 같아 보였다) 그리고 이어진 그의 답변은 이외로 단순했다.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된다'라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 아주 뻔하디 뻔하지만 틀린 부분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이제 막 그의 여행담을 들은 터라 그가 하는 말은 틀린 말일지라도 맞는 말처럼 들렸다.
질문자는 살짝 실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 것 외에 다른 답변을 듣고 싶었는지, 혹은 그냥 질문을 통해 그와의 접점을 (그러니까, 진짜로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찾고 싶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살을 뺄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덜 먹고, 더 많이 운동하면 가능하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덜 먹고 운동을 하면서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에 의존하는 것처럼, 여행에서 누군가를 만나는 것 또한 더 나아가 사람을 만나는 것 또한 이미 아는 사실 외에 다른 무언가를 찾고자 하는 듯했다.
한 번은 헬스장에서 P.T를 업으로 살아가는 사촌동생에게, 큰 기대가 찬 눈빛으로 질문을 한 적이 있었다.
"윤아? 뭘 먹으면 살이 안 찌고 살을 뺄 수 있을까?" 철저하게 비즈니스 관계가 배제된 가족에 가까운 사촌동생은 나에게 칭찬도 아깝다는 말투로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딱 한마디를 해 주었다.
"형님, 뭘 안 먹고 뺄 생각을 해야지. 뭘 먹으면서 뺄 생각을 하지 마라"
오랜만에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도저히 호기롭게 웃으며 받아 칠 반박 거리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어쩌면 반박을 하는 것도 나 자신이 더 초라해지는 행위일 뿐이었다.
그렇다. 딱히 다른 방법은 없다.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면 그 선택이야말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방법일 것이다. 물론 만남이라는 것과 인연을 맺는다는 것은 다이어트처럼 과학적 근거를 기반해서 생겨나는 결과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다가오기를 기다릴 인내심으로 한 번쯤은 다가가는 용기를 내는 것이 죽을 정도로 힘든 것이 아니라면 오히려 더 희망 가득한 선택이지 않을까?
그럼에도 내가 소위 말하는 T성향이라서, 도저히 말 붙이는 것이 어렵다면? 반대로 생각해 보자. 상대도 그만큼 어려울 것이다. 그렇기에 그 어려운 마음을 극복하고 본인에게 다가온다면 정말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첫걸음이 아닐까? 누군가 다가오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극단적으로 봤을 때는 아무도 오지 않을 수도 있다. 결과적으로 0% 확률에 가까운 선택이니 말이다. 그러나 먼저 다가간다면 100%에 가깝다. '될 때까지 하면 되기 때문이다' 불확실한 가능성에 선택한 후에 상처받으니, 차라리 다가가서 거절을 당한 후에 상처를 받는 게 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 적어도 용기 있는 사람은 되어 있을 테니 말이다.
한국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아니 수십 번은 들었을 이야기 일 것이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는 늘 반만 맞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맞는 절반보다는 그 반대의 절반을 맹신하는 편이다.
무엇이든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그러나 너무 조심만 하다 보면 여행 중 내 기억은 그저 주변으로부터 나를 방어하고, 누군가의 접근을 경계했던 기억만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행의 목적이 관광지에 가서 현지 맛집을 가고, 사진으로 순간을 기록해 두고 기념품을 사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라면 모르겠지만 남들과 다른 여행을 하고 싶다면 혹은 다른 삶을 개척해 보고 싶다면? 그렇게 해 보자.
결국 모든 만남의 첫 단계는, '낯섦'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
한국 사람들은 유독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조심스러워한다. 남에게 나의 치부나 단점을 들키고 싶지 않아 한다. 물론 자기 관리 측면에서는 좋은 것이나,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완벽한 사람보다 적당히 빈틈 있는 사람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빈 틈 없는 사람 즉 곁을 내주지 않는 사람과 어울리는 것은 용기만큼이나 상처받을 각오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빈 틈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람들은 노력 없이도 자연스럽게 마음이 열린다.
생각해 보면 유치원도 학교도 더 나아가 성인이 된 이후에 사회생활에서도 우린 끊임없이 낯선 만남을 이어간다. 처음엔 어색하지만 그 순간의 어색함은 앞으로 기록되어 갈 추억에 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순간의 찰나 일 뿐이다.
여행 또한 오늘의 일부라고 생각한다면? 낯선 사람을 무서워할 필요도 그렇다고 피할 필요도 없다.
예를 들어서 '뉴스에서 특정 나라에서 일어난 범죄를 언론에서 보도했다는 이유로, 그 나라를 가지 않겠다고 하면, 반대로 대한민국에서도 동일한 범죄가 일어났을 때 한국을 떠나지 않을 것인가?'라고 생각해 보면 어느 정도 결론이 나온다.
교통사고가 무섭다고 해서 평생 차를 타지 않고 살 것이 아니라면,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 정작 맛없어서 실패할까 봐 걱정이 돼서 오늘도 어제 먹었던 같은 밥과 반찬을 먹을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만나는 것 또한 무섭고 낯설다는 이유로 피할 이유는 없다.
조심하는 것과 피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영역이다. 피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행위라면 조심하는 것은 일단 무엇이라고 해 보고자 하는 의지인 것이다. 어쨌든 감정의 경계를 조금만 해제한다면, 혹은 마음의 경계를 조금만 해제한다면 그 결과는 또 앞으로 다가 올 미래는 많이 달라져 있을지도 모른다.
낯섦의 반대말은 익숙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익숙은 낯섦을 극복해야만 다 다를 수 있는 영역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