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어린 시절에 꽤나 즐겨보던 tv 프로그램이 하나 있었는데 연예인들이 그 날 하루는 일일 직원이 되어서 일당을 받고 일을 하는 지금 인기 있는 유튜브 채널 '워크맨'의 나름 조상 격 되는 프로그램인데 이쯤 이야기하면 30대 이상은 아 ~ 그거 하면서 알법한 그 프로그램의 이름은 '체험 삶의 현장'이다.
체험 삶의 현장, 이 6글자가 주는 무게감은 시간이 흘러도 그것을 대체할 만한 단어가 없어 보인다.
하루는 문득 삶의 현장을 체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5년 넘게 한국을 떠나 있으면서 겪고 있는 변화의 혼동 속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었다고 할까? 아니면, 서울에서만 살아가는 연예인들이 하루 정도 지방 소도시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는 느낌을 나도 좀 느껴보고 싶었을까? 나는 이런저런 이유를 막 갖다 붙이며 나는 주말 하루를 알바에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던 중에 취업을 준비하면서 틈틈이 알바를 하고 있는 아는 동생 덕분에 일용직 알바 자리를 하나 얻을 수 있었는데 일당이 8만 원이라고 해서 음? (좀 적은데?) 내키지는 않았지만 일이 그렇게 힘들지 않다는 이야기에 또 어차피 오늘 하루는 일보다 '무엇인가' 새로운 일을 해본다는 사실에 의미를 두고 나는 냅다 call을 외쳐 버렸다.
<아침 6시 20분 기상>
1년에 몇 번 없는 불금을 하필 일일 알바 전날 거하게 보낸 후 내일 아침 잘 일어날 수 있을까?라는 걱정 속에 잠이 들었지만 다행히 비행기를 놓치면 큰일 날 것 같은 사람처럼 작은 벨소리에도 눈이 번쩍 뜨였다. 눈을 뜨고 나갈 준비를 하고 있으니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금일 업무 담당자였는데 오늘 출근이 가능한지 확인하는 문자였다. (주말이다 보니 당일날 펑크 내는 인원이 있어서 그런가?라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가기 싫어졌지만)
- 6시 50분 길을 나서다 -
평소보다 분주하게 움직인 탓에 일어난 지 30분 만에 집을 나와서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 서울의 교통 체증 때문에 버스를 피하는 편이었는데 다행히도 토요일 아침은 거리도 버스 안도 한산했다. 오랜만에 타는 버스 안에서 잠시나마 여유로운 주말 아침을 느끼려 애쓰고 있는데 스타벅스 앞에 엄청 많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모습이 여러 번 포착되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얼마 전 뉴스에서 봤던 이벤트 때문에?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저기 줄 서 있는 사람들도 참 부지런하구나 싶으면서도 무엇이 더 가치 있는 시간일지 잠시 생각해 보던 사이에 어느덧 버스를 도착을 했다.
다행히 환승까지 무사히 마친 후 버스는 30분 정도를 더 내 달렸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이른 아침 타는 한적한 버스 안에서 한적한 거리를 내다보는 시간 덕분에 기분이 살짝 좋아지기는 했다.
- 7시 40분 약속 장소에 도착을 하다 -
여기는 어딘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상상한 모습과 조금 달랐다. 공사장 혹은 큰 창고를 상상했는데 넓게 잘 관리되어 보이는 건물 숲이었다. 8시까지 20여분의 시간이 남아서 무언가를 먹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주변에는 문이 열려 있는 가게는커녕 편의점도 하나 안 보였다. 편의점을 하나 발견했지만 문을 열지 않았다. 건물 숲 주변은 넓었지만 주말 아침 활기는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적막했다. 오피스 단지 같은 이곳의 평일을 상상하며 안으로 걸었다. 무슨 일을 할지는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지만 회사에 첫 출근하던 날처럼 긴장이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일일 아르바이트생에게 시킬 일은 뻔했기 때문이라.
- 8시, 출석 체크 -
현장 반장으로 보이는 분이 몇 분 계셨는데 그중에 한 분이 내게 오더니 대뜸 반말로 이름을 물었다. 순간 뭐지?라는 생각에 나 또한 똑같이 반말로 (하고 싶었지만) 습관처럼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어차피 오늘 하루 일 할 텐데 이런 일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 그 뒤에도 줄곧 반말 퍼레이드가 이어져서 나의 성질이 꿈틀꿈틀거렸지만 다행히 헐크로 변하지는 못했다. (나중에 경험이 많은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여기는 그래도 욕은 안 한다면서 괜찮은 분들이라고 했다) 마치, 욕먹는 게 정상이고 안 하면 아주 좋은 사람들이라는 인식에 박혀 있는 말처럼 들렸지만 크게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오늘 하루는.
- 8시 30분, 본격적인 일당 벌이에 나서다 -
8시가 조금 넘어서 우리는 건물 지하로 들어갔다. 밝은 야외를 벗어나 어두운 건물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오늘 일당 8만 원을 위해서 모인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다양한 나이 때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남자만 10명이었다. 오늘 이 친구들과 8시간 정도 같이 일을 하게 될 테지만 굳이 인사말을 건네지는 않았다.
웬만한 백화점보다 커 보이는 이 건물에서는 엄격한 분위기를 유지한 채 발열 체크를 했고 반장으로 보이는 아저씨들이 파란색으로 보이는 무언가를 열심히 깐 후에 큰 트럭 하나가 지하 주차장으로 들어왔다. 이제 우리에게 본격적인 일이 주어졌는데 트럭에서 두 손으로 안기에는 조금 벅찬 크기의 박스를 열심히 내리는 것이었는데 그런대로 할만했다. 문제는 오늘 내려야 할 의자가 1,200개라고 한다. 1,200개를 내리려면 큰 트럭이 15번 정도 다녀가야 하는 것이 들었다.
트럭이 5번 정도 오고 간 후에 바닥에는 어마 어마한 수의 박스들이 놓여 있었다. 더 이상 박스를 놓을 공간이 없어지자 그때부터는 박스에 들어 있는 물건들을 다 꺼내기 시작했다. 박스 안에 그것 그것은 다름 아닌 사무실용 의자였는데 문제는 완제품이 아니고 조립식이었다. 즉, 박스에서 꺼내서 하나하나 조립을 해야만 했다. 그리고 이걸 다시 건물 위로 올리는 게 일이었다. 노동 강도는 단순 노동보다는 힘들었지만 건설 현장보다는 수월한 정도의 수준이었다. 하지만 시급 만원을 받기엔 확실히 힘든데?라는 느낌이 들었다.
<일하면서 기록을 위해 중간중간 사진을 찍어두었다>
주차장에 흠집 방지를 위해서 파란색 무언가를 깔고 그 위에 박스를 내리고 그것을 뜯어서 의자를 조립하고 사무실 위로 보내는 일. 이론상으로는 아주 간단한 일이었지만 업무 현장은 늘 이론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박스에서 꺼낸 의자 부품들을 조립하고 사무실로 올려야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수용 한계가 있어서 뒤로 갈수록 작업이 더디어졌다.
지하 1층에서 에어컨은커녕 선풍기 하나 없는 이 곳에서 남자들끼리 거친 호흡을 내뱉다 보니 이 곳은 금세 후끈해졌다. 마스크를 벗고 싶었지만 S기업 계열사가 입주해 있는 기업이라 마스크 착용에 대해서 상당히 엄격했고 박스에서 나오는 먼지 때문에 벗을 수 있어도 벗고 싶지 않은 그런 환경이었다.
<점심을 먹으러 가다>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만!이라는 생각으로 버티다 보니 점심시간이 다가왔다. 12시가 조금 넘어서 점심을 먹으러 이동했는데 점심은 건물 맞은편에 있는 한식 뷔페였다. 13년 전 군대를 전역하고 잠시 했던 건설 현장 함바집에 비하면 무척이나 맛이 없어서 오후 체력 비축을 위한 정도로만 먹은 후에 잠시 쉬려고 하는데 사람이 부족해서인지 아니면 내려야 할 의자가 많아서인지 밥 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작업이 시작 되었다.
왜? 1시간 휴식 보장을 안 해주냐고 또다시 따지고 싶었지만 분위기가 따지면 나만 이상한 사람이 될 것 같은 분위기를 감지했다. 그래 반나절만 입 닫고 시키면 "네네" 하고 시간 되면 집에 가자.라는 생각을 하며 참았다.
오후부터는 쉬는 시간도 거의 없이 일을 했다. 잠시 쉬고 싶었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이곳은 지하 주차장이었고 지상은 걸어서 나가야 했지만 원형으로 된 오르막 길을 보고 있으니 그냥 여기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설 현장 일용직 일은 위험하고 힘들기는 했지만 30분 일하고 담배 하나 피우고 한 시간 일하면 참도 먹고 그랬었는데 이곳은 임시 아르바이트 직원이라고 소위 뽕을 뽑는구나.라는 느낌이 들게 할 만큼 쉴틈 없이 일을 시켰다.
그나마 햇빛을 피할 수 있다는 건 그나마 위로가 되는 하루였다. 하지만 아무리 재미있는 일도 계속하면 재미없고 아무리 맛있는 음식도 계속 먹으면 물리는 것처럼 노동 강도에 지치는 것이 아니라 끝이 안 보이는 물량(의자 1,200개) 때문에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후에 쉬지 않고 일 했지만 속도가 나지 않아서 연장 근무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다. 나는 1초의 고민도 없이 거절을 했지만. (나중에 듣기로는 9시까지 연장 근무를 했다고 한다. 5시 이후 1.5배 따위는 당연히 없음은 물론)
오후에는 알바 인력의 절반이 의자 배송을 위해 사무실로 가는 바람에 사람은 부족하고 손에 힘은 없는 상태에서 꾸역꾸역 일을 하다 보니 어느덧 5시라는 숫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미련 없이 영혼 없는 인사를 건넨 후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는데 입에서 짭조름한 맛이 느껴졌다. 오늘 흘린 땀을 입으로 직접 먹고 느낀 하루였다?라고 할 수 있을까?
오늘 극한 알바?를 소개해준 동생에게 감사의 의미로 치킨을 사주고 나니 오늘은 사실상 무료 봉사? 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오늘 나에게 필요한 것은 8만 원이 아니었기에 금전적 기준은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상해버린 건 단 돈 500원 때문이었는데 현장에서 바로 주는 줄 알았던 일당은 다음 날 통장을 통해서 들어왔는데 웬걸?통장에 79,500원이 찍혔다. XX은행이 아니면 수수료 500원 빼고 준다나.
거 참 빡빡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초기에 목적(체험 삶의 현장)은 달성을 했으니 오늘 하루 따질 거 안 따지고이번에도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아마도 나를 고용한 사람에게 그 500원은 소중했는지도 모르니 말이다.
P.S 이 글은 일당 8만 원에서 수수료 500원을 제외하고 79,500원을 송금해 준 고용 업체에 빡쳐서 쓰게 된 글이었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금은 공론화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같이 담았음을 알려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