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갑작스러운 미국 법인 발령으로 오랜 시간 가족을 못 볼 거 같다는 생각에 아쉬움보다는 설레는 마음으로 부랴 부랴 부산에서 주말을 보낸 후 헤어지면서 나눈 인사였다.
나는 그 길로 서울로 올라와서는 미국 영사관이있는 광화문으로 향했다.
사실 뒤늦은 고백이지만 광화문에 있는 미국 영사관은당시 내 인생 30년에 있어서 처음이었고 처음 본 순간 그 웅장함에 반했었다. 하지만 그때는 알지 못했다. 이 추운 날씨에 내 마음까지 꽁꽁 얼어버릴 줄은 말이다.
철저한 신분 확인과 휴대폰 반납 후 처음 들어와 본 이 곳은 바깥에서 보는 것과 다르게 적막함만 감 돌았다.
웃음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곳은 어느 회사의 중요 시험장 분위기와도 같았다.
은행처럼 나에게 주어진 번호표를 들고 있으니 드디어 나에게도 차례가 왔다. 내 차례가 다가올수록 잘못한 것도 없는데 심장이 떨렸다. 혹시 비자가 안 나오면 어쩌나?라는 걱정과 범죄 기록이 있는 것도 아닌데 괜찮겠지?라는 생각 사이에서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려애썼지만영사랑 인터뷰를 할려니 몹시 긴장이 되었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인사를 건넸지만 그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다. 나의 악몽은.
역시나 준비했던 말들은 버벅 거리기 시작했고 영사의 표정은 점점 일그러져 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한국인 통역사 분의 도움으로 나의 버벅거림은 해결이 되었지만 영사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 상황이 쉽게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에서 나는 그저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전 세계 수많은 외국인 노동자 중 한 명으로 밖에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나는 나의 상황을 영사에게 이해시켜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지난주에 부산까지 가서 가족과 인사하고 온 의미도 없을뿐더러 회사에는 뭐라고 할 것인가?
이미 찍혀 버려서였을까? 인터뷰는생각보다 금방 끝이 나버렸고 나는 도장을 받았다. 무슨 색깔인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영사의 거만스러운 당당함과 통역해주시는 분의 대략 난감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이 도장은 입국 거부라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주변 분위기를 살필 겨를도 없이 "왜냐고?" 따졌지만 한번 찍혀 버린 도장은 '권위 의식에 가득 차 있는 스포츠 심판의 판정처럼' 번복되지 않았다.
계속 따지고 싶었지만 담당자는 더 이상 나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는지 곧바로 다음 인터뷰 대기자를 불렀다. 적어도 그에게 나는 하나의 인격체보다는 빨리 처리해야 하는 업무 중 하나였을 뿐이었다.
나는 너울성 파도에 떠 밀리듯 그곳을 벗어 날수밖에 없었다. 나가는 길에 휴대폰을 돌려받았지만 열어 볼 자신이 없었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먼저 알려야 할까?라는 생각을 하며 무작정 걸었다. 12월의 서울 매서운 바람이 나의 얼굴을 때렸지만 마음속 깊은 곳부터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나는 동상이 걸려도 모를 정도로 감각을 잊어버린 듯했다.
이 충격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손이 떨리는데 추워서 떨리는 건지 괜한 분함에 떨리는 건지 알 수는 없었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어느덧 지하철 입구였다.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기 전 일단은 회사에 보고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전화로 보고를 한 후에 지금은 끊어 버린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그 담배가 다 타 들어갈 때쯤 다른 한대를 꺼내었다. 그때 처음 속이 타 들어가는 기분을 느꼈다.
어릴 적 나는 초등학교에서 반장을 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던 아이였지만 현실은 청소 부장도 맡기 어려울 정도로 학교에서 존재감 따위는 없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외모가 준수해서 인기가 많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군중 사이에서 숨어 버리면 아무도 찾지 못할 정도로 티가 전혀 안 나는 그런 소심함으로 똘똘 뭉친 그런 아이였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좀 달라졌다. 대학교에서는 소위 인싸로 통했고 축제에서 노래 한곡 신나게 불렀더니 다음날 학교에서는 유명인사가 되어 버려 얼떨결에 총학생회 선거까지 출마하여 당선까지 되어서 값진 대학 시절을 보내었다. 이제는 경험 많은 노련한 인싸가 된 것이다. 그런 활약 덕이었을까? 처음으로 이력서를 제출 한 회사에 덜컥 합격을 해 버렸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이력서를 100번 썼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공감을 못 한다.
그 후 20대 중반에는 감히 나만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특유의 인싸 기질과 자신감으로 나 홀로 여행을 시작했고 한 번은 강남 스타일 춤 하나로 숙박과 숙식을 해결해 버리는소심했던 아이는 혼자 배낭 하나만 메고 있으면 두려울 것이 없는 진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자신감으로 한국에서는 누구나 알법한 외식 기업 해외 사업부로 입사를 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20살 이후의 내 삶은 늘 성공의 연속이었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해 겨울 인생의 실패라고 생각한 일이 바로 미국 비자 거절이었다. 입사한 지 불과 3개월이 되었을 때였다. 실패라는 기준 또한 같은 음식의 평가가 엇갈리는 것처럼 개개인마다 다소 다르게 적용이 되겠지만 적어도 내 삶에 있어서 미국 비자 취득 실패는 그러했다. 그냥 내 삶이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을까?>
첫 번째는 만약 미국을 가게 된다면 나는 2014년 1월부터 근무를 하게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해는 한국에서는 멀지만 미국에서는 비교적 가까운 브라질에서 월드컵이 열리는 해였기에 나는 결재도 받지 않은 여름휴가까지 다 계획해두었다.
두 번째는 '가족들의 실망' 사실 위에 이유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는 건 무척이나 괴로운 일이었다. 아무래도 미국이라는 세계 경제 중심 국가에서 일할 기회가 생겼다는 것은 부모님 입장에서는 큰 자랑거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나 또한 마찬가지)
세 번째는 '거절이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미국 입국을 앞두고 비자를 거절당했다고 하면 트럼프 정부의 강력한 정책 때문에 이해를 하지만 그 당시만 하더라도 왜?라는 시선이 많았다. 오히려 미국 영사의 형평성보다는 나에게 문제를 찾으려고 하는 문제가 많았다. (인터뷰 때도 불법 체류가 의심된다는 게 비자 거절의 큰 이유였는데 실제로 미국 내 한인 불법 체류자가 20만 명이라고 하니 이해가 못 가는 것도 아니다)
<그 후>
나는 미련이 남아서 단기라도 다녀 올 방법을 찾았지만 후에는 단기 비자 조차도 발급이 되지를 않았다. 그래도 새해가 된 후에는 새 출발하는 마음으로 시작을 하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회사에서는 해외 진출을 준비하던 주요 국가 시장 조사 업무를 맡겨 주었고 이후에는 인도 법인 설립을 준비하면서 3개월 정도 인도 현지에서 일을 할 기회도 있었다. 그리고 예상했겠지만 마지막 종착지는 대만이었다.
대만 발령 이후에 나는 귀임을 포기하고 퇴사를 선택했다. 그리고 대만에서 5년이라는 시간을 더 보낸 후 지금은 한국에서 그때의 일을 추억하며 글을 쓰고 있다. 지금은 추억이라고 말하는 그 시간을 지금도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다. 더 좋은 길을 가기 위해서 잠시 돌아가는 것뿐이었다. 다만 그때는 몰랐을 뿐이다. 그때 미국을 갔더라면 나는 대만이라는 나라는 그저 수많은 여행객 중 한 명으로 방문했을 것이다. 대만에서 보낸 5년이라는 시간을 돌이켜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미국을 못 가게 되어서 지금은 감사하다고 말이다. 혹여나 누군가 다시 그때로 돌아가서 선택권을 나에게 준다면? 그렇게 묻는다면 나는 똑같은 선택을 할 것만 같다. 왜냐하면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알 수 있으니까 무엇이 더 나를 그토록 바뀌게 만들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