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의 나는 "토익 점수로 나를 평가받지 않겠다"라고 외치고 다니던, 사회가 원하는 인재와는 거리가 있는 그저 아집으로 똘똘 뭉쳐서 넘치는 것은 혈기밖에 없던 또 다른 부류의 인재였다.
당연하게도 현실 속 사회는 내 생각과 철저하게 반대였다. 특히나 기업은 인재 선발에 있어서 철저하게 논리적이고 냉정했으니 (핵인싸 + 다양한 활동과 경험 < 토익 고득점) 남들이 다 목표로 하는 3대 중공업(삼성, 현대, 대우) 대기업은 서류 지원도 불가능했다. "그래, 대기업은 안 가면 되지? 안 그래?"라는 쿨한 척하는 철학을 고수했지만 문제는 졸업이었다. (졸업 시 일정 수준의 토익 점수가 필요했던 것이다)
사실 한국 해양대학교로 편입을 하게 된 계기도 나의 전공(조선 설계)을 활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학교 중에서도 유일하게 토익 성적표를 요구하지 않았던 학교였기 때문이다. (그다음 해 2011년도 편입부터는 토익 성적표 제출 의무화로 바뀜) 운으로? 편입까지는 성공했지만 졸업을 할 시기가 다가오니 나는 어쩔 수 없이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까지 와서 토익 성적표가 없다는 이유로 졸업을 포기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만들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렇게 나는 29살이라는 나이에 처음으로 토익 시험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첫 토익 점수는 250점>
아마도 평생 잊지 못할 숫자일 듯하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주변에서 첫 시험은 대부분 '신발 사이즈'가 나온다고, 위로해 주었지만 사실 큰 위로가 되지 못했다. (참고로 나의 신발 사이즈는 270이다)
고득점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지만 내심 500점 정도는 기대를 했는데 그에 딱 절반 수준이었다. 그래도 한 번에 포기할 수 없었고 한 달 후 두 번째 성적표를 받았다. 그렇다. 소제목에서 언급된 380점은 두 번째 시험 성적표였다.
사실 두 번째 성적표를 확인한 후에 "그럼 그렇지. 250점은 처음이라서 그랬던 거야"라고 잠시 자만했다. (고작 380점 주제에 말이다) 그런데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로 2번 정도 더 시험을 친 거 같은데 380점이 내 삶에서 최고 점수였다. 그런 나에게 좌절감이 밀려왔고 학원을 가는 것도 문제집을 잡고 반복된 학습을 하는 것도 단어를 외우는 것도 하기가 싫어졌다. 아니, 내가 이런 방식으로 공부를 해서 지금 이 상태인데 계속 이렇게 해야 할까? 노력이 부족했을까? 방법이 잘못되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노력이 부족했다는 표현이 더 옳을 듯하다. 하지만 그때는 방법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환경에 변화를 주는 쪽으로 생각한 것이 바로 해외 어학연수였다.
- 어학연수를 결심한 사연 -
결국에는 30살을 몇 개월 앞두고 다급한 결정을 내렸다. 가자고 말이다! 단순히 성적표를 위한 학습은 졸업을 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서도 큰 동기 부여가 되지 못했고 성격에도 맞지 않는 듯했다.
나는 좀 더 신나게 공부하고 싶었다. 어릴 적 마이클 잭슨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때 가사의 뜻을 알고 싶어서 단어 하나하나 해석하고 공부하던 그때처럼 말이다. 떠나면 잘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특히 마지막 방학을 터키에서 보내고 돌아온 후에 다시 직장인으로 돌아가기 전에 좀 더 멀리 좀 더 길게 떠나보고 싶다.라는 욕구가 나의 뇌를 하루 종일 자극했다.
어쩌면 즉흥적인 결정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나는 해야겠다고 생각을 하면 그것을 바로 하지 않으면 못 견디는 성격, 바꿔 말하면 참을성이 없는 성격이었다. 하지만 그때 더욱 신중하게 고민했더라면 오히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고 시간만 낭비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그때의 나 자신에게는 늘 칭찬을 해 준다. 인생에서 큰 터닝 포인트가 될 선택을 즉흥적으로 해 버렸다는 게 참 우습기도 하지만 그때의 선택이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으니 말이다.
자, 정리하자면 어학연수를 결심한 사연은 "재미있게 언어를 배우고 싶어서"와 "여행을 가고 싶어서? 아니 어디든 떠나고 싶어서"로 보면 될 듯하다.
<2013년 1월 9일 긴 여정을 위한 출국>
즉흥적인 선택이라고 말했지만 막상 간다고 생각을 하니 (내 나이 30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즐겨 부르던 그 시절) 정말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 될 이유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의 18대 대선이 끝난 후 스스로도 더 이상 물러 날 곳이 없는 심정으로 긴 여정을 시작하는 비행기에 탑승을 했다. 이렇게 오랜 시간 집을 떠나게 되는 것이 군대를 제외하면 처음이었는데 그래도 군대와 다르게 떠난다는 설렘이 또다시 나의 뇌를 자극했다. 잘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가서 말도 제대로 못 해서 버벅 거리면 어쩌지?라는 걱정 사이에서도
나는 행복했다. 떠난다는 사실은 안 기쁠 이유가 없었다.
비행기는 홍콩을 경유해서(경유한 김에 3일 정도 스톱 오버를 한 후) 필리핀의 수도 마닐라에 도착했다. 하지만 최종 종착지까지는 버스를 타고 5시간을 더 가야 했는데 그곳은 필리핀에서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바기오'였다. 밤 11시 공항 근처에는 생각보다 많은 한국인들이 보였는데 나처럼 어학원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리고 밤 12시가 될 무렵 나는 시원한 에어컨이 나오는 버스에 탑승을 했다.
- 바기오에서의 첫날 그리고 한주 -
밤새 달린 버스는 이른 새벽 바기오 내가 지내게 될 어학원에 도착을 하였다. 잠시 내가 지내던 바기오에 대해서 잠시 설명을 하자면 해발 1700m(한라산 정상과 비슷) 고지대에 위치해서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시원했고 공기는 맑았다. 한마디로 '공부하기 좋은 날씨였다'
<바기오에 도착한 첫날 숙소에서 찍은 사진. 주변에는 산 밖에 없다>
첫날은 특별한 것이 없었다. 유학원에서 사전에 안내받은 대로 방을 배정받고 밤새 함께 버스를 타오 온 동기들과 짝을 이루어 쇼핑몰을 가서 개인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사고 환전도 했다. 처음 만난 동기들하고는 어색할 틈도 없이 금방 친해졌다고(나는 생각하는데) 비슷한 이유로 고향 떠나 타지에서 만난 사람들만큼 의지하기 좋은 건 없더라.
- 난생처음 영어 이름을 만들다 -
스파르타식을 지향하는 이곳의 어학원은 기본적으로 한국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영어 이름을 사용했다. 생각해 보니 영어로 대화해야 하는데 한국어 이름을 부르는 것도 좀 이상한 듯해 보였다.
영어 이름은 중복 방지 차원에서 1 지망과 2 지망이 있었는데 다행히 나의 영어 이름은 300명이 넘는 학생들 사이에서도 중복되는 일이 없었다. 나의 영어 이름은 'JACKSON' 그렇다. '짹슨'이다.
가끔 사람들이 왜 짹슨인지 이유를 묻는데 그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수가 마이클 잭슨이었기 때문이다. 정확히 짹슨은 이름이 아니라 '성'이지만 발음이 입에 착 달라붙는 '잭슨' 아니 '짹슨'을 선택했다.
- 첫 주의 시작 그리고 첫 번째 주말에 한 일 -
오리엔테이션까지 마친 후 첫날 오전에는 반 편성 및 등급에 맞는 수업을 위해 개별 테스트가 이루어졌다. 테스트는 무언가를 듣고 쓰고 나중에는 선생님이 동화책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주면 설명을 하는 것이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들이 그때는 그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다. 내 옆에서 쉼 없이 무언가를 쏟아내는 여학생을 보며 주눅이 들어 버려 나는 뭐라고 하는 척이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똑같은 문장 하나만 5번 정도는 반복했는데 그럼에도 2급을 받았다. (2급 아래에는 1급이다. 사실 이 두 개는 큰 차이가 없음에도, 1급 교재를 들고 다니는 학생을 발견하면 알 수 없는 위로와 안도감이 들었지만 그건 얄팍한 감정이었다)
학생만 300명이 넘는 어학원에서 첫 주는 영어공부보다는 공부를 하기 위한 환경에 적응하는 시간에 가까웠다. 특히 4명이 한 그룹이 되어 진행되는 발음 수업에서는 친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야 부끄러움이 줄어들 것이고 자신감이 중요한 언어 수업에서 적극적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룹으로 하는 발음 수업 때는 거의 개그 콘서트 수준이었다. 발음 담당 선생님이 엉뚱하고 재미있기도 했지만 나의 예측 불가한 발음 덕분에 다들 웃음을 참지 못 해서였다.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는 나는 더 이상 부끄러워하지 않기로 했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정신없는 한주가 지나가니 주말이 찾아왔다. 주말에는 외출이 가능했고 이 곳에서 유일하게 기다려지는 시간이기도 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주말에 외출을 했고 아예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나도 그 사이 친해진 동기들과 첫 외출에 나섰다.그리고 나는 곧바로 눈에 보이는 미용실에 들어가서는 말했다.
"머리 싹 다 밀어주세요"
그렇다. 삭발을 해달라고 했다. 나와 말이 안 통하는 미용실 직원은 몇 번이고 확인 후에(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으니) 내 머리를 시원하게 밀어주었다. 열심히!라는 의지를 다짐하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지만 그냥 시원하게 밀어 보고 싶었다고 할까? 그렇게 하면 왠지 기분이 좋아질 것 같았다. 하고 싶은 건 해야 행복하다고 느끼니까 그렇게 했다.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어차피 이곳에서는 수많은 헤어 스타일 중 하나일 뿐?이었다. 게다가 머리가 없으니 신경 쓸 일이 하나 줄어서 다른 곳에 더 신경 쓸 수 있게 되었다.
<삭발을 하면 일단 편하다. 머리를 감을 일도 말릴 일도 없다>
- 이곳의 하루 일과 안내 -
결정은 즉흥적이었지만 이 곳에 오기까지 들인 노력과 비용을 생각하면 이 시간을 절대 허투루 사용할 수 없었기에 수업을 하는 평일만큼은 더욱더 고삐를 조이기로 했다.
아침 6시 30분 기상해서 7시부터 약 30분간 수업(안 듣고 자도 되므로 수업 참여자는 매일 20명 전후)을 들은 후에 아침을 먹고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 정해진 커리큘럼에 맞춰서 수업을 했다.
오후 5시부터 8시까지는 자유시간 겸 저녁 시간이었는데 외출은 사유가 있으면 30분 정도의 외출이 가능했다. 나는 주변 산책음 이유 삼아 평일 오후에도 30분 정도의 외출을 신청했고, 그 시간에 해발 1,700m상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달렸다.
<처음엔 혼자였지만 나중에는 두 명이 되고 세명이 되었다>
그리고 저녁 식사 후 8시부터 10시까지 의무 자율 학습이 끝나면 오후 10시였다. 하지만 나는 매일 밤 영어 일기를 몇 줄이라도 적었고 다음날 1:1 수업해서 교정을 받았다.
'4인실 방에서 '제일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제일 먼저 일어나 하루를 시작' 했다. 그렇게 정신없이는 한 달이 흘렀다'
- 한 달 후 찾아온 변화 -
하루는 동기 중 제일 연장자인 (이름은 기억이 안 난다. 7년 전 일이라..) 60대 어르신이 내게 이 곳에 온 이유를 영어로 물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이 내가 아무렇지 않게 영어로 답변을 하고 있었다. 그런 내가 나 자신도 놀러 울 지경이었다. 더 이상 영어 질문에 '어 ~~~' 하지 않았다. 내가 말하면서도 내가 뭘 말하고 있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내 입은 쉬지 않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었다.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상황을 지켜보던 주변에서는 놀람을 감추지 않았다. 내가 영어로 대화를 하다니? 그것도 한 달 만에? 가능하냐고? 뭐 불가능할 이유도 없지 아니한가.
이제 더 이상 "Can I help me? 가 맞나요?"라고 물어보는 일은 없어졌다.
첫날에 나와 함께 발음반에 편성된 동생들이 내가 발음할 때 터져 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는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선하지만 섭섭한 적은 없었다. 내가 생각해도 나의 발음은 충분히 웃겼기 때문이다.
게다가 'Can I Help me가 맞아요?라는 질문을 했었으니 말이다. 결국 나는 "노력 + 자신감"으로 하루하루를 보낸 만큼 발전을 했다. 물론 하루아침에 현지인 수준의 영어를 구사하는 건 아니었다. (그건 지금도 그렇다)
'잘하고 못 하고는 중요하지 않았다. 가능한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내가 영어를 잘하고 발음이 좋았으면 이 곳에 있을 이유가 없지 아니한가?
첫 달이 지나가고 어느덧 두 번째 달이 찾아왔다. 두 번째 달은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우선 Room Mate가 바뀌었다. 첫 달은 4명의 한국인이 같이 생활했지만 남은 한 달은 1명의 필리핀 선생님과 3명의 한국인이 같이 생활하는 방식이었다. '눈 뜨고 잠자는 순간까지 영어로만 생활해야 하는 과정' 이 시작된 것이다. 이는 3월 초에 곧바로 유럽으로 가서 생활해야 하는 나에게 중요한 시간이기도 했다. 그런데 너무 자주 봐서 그랬을까? 선생님들과 너무 친해져 버렸다.
- 친구 같은 선생님들과 -
<선생님과 학생이 이렇게 지낼 수 있는 분위기가 이 곳에 계속 머물고 싶게 만들었다>
- 하루 세끼가 한식으로 나오는 이 곳은 나에게 지상 낙원이지만... -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시간이 깨알 같았던 건 기억에 이토록 강렬하게 남아 있는 건 좋은 사람들과 좋은 선생님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는 운이 아니라 복이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 한 사람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와 반대로 함께 지내는 Room Mate들과 사이가 안 좋다던지 모든 것을 공용으로 사용하는 것 자체가 익숙하지 않다던지 혹은 몇 개월 간 집을 떠난 것이 신나지 않고 힘들었다던지 말이다. 평일에는 외출 시간이 30분에 불과했고 어학원 내에서 한국어를 사용하다가 적발되면 벌점을 먹는 등의 상황이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곳을 자의적이 아닌 타의적으로 온 친구들은 그러한 상황이 더욱 힘들었으리라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개인에 따라 이 곳 음식이 입맛에 안 맞는 이에게는 이 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고역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에 반해 나는 필리핀 바기오에서 생활이 아무 만족스러웠다. 우선 공부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 좋았고 함께 생활하는 동기들과 합이 참 잘 맞았던 거 같다. 동기라고 하기보다는 같은 날에 들어온 것이 전부지만 20살 대학생들부터 왕년에 동네에서 이름 좀 날렸을 것 같은 40대 누나와 나보다 3년 정도 먼저 태어난 형부터 공기업 한전을 퇴사하고 공부하러 오신 60대 어르신까지 잠시나마 30살에 어학연수? 가 옳은 선택일까?라는 스스로 만든 굴레에 갇혀 있던 나에게는 그들은 존재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하루 3끼가 한식으로 나오고 디저트로는 열대 과일이 나오기 때문에 평일에는 잘 먹고 열심히 공부하고 주말에는 실컷 놀면서 공부하느라 지친 나에게 휴식을 주고 이 곳을 오지 않았더라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 이하 중간 생략 -
<Time to say goodbye>
2개월이라는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가 버렸고 어느덧 떠날 준비를 해야만 했다.
짧은 시간이었기에 소중하게 시간을 보낸 듯해서 다루고 싶은 이야기가 많지만 그건 언제까지나 개인적인 추억거리일 뿐이기에 이 공간에서는 마지막 날 이야기만 간략하게 하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꼭 하고 싶은 이야기는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정말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것이 해외 어학연수라고 생각을 한다. (이것이 오늘 글에서 말하고 싶은 메시지이기도 하다)
나는 반년 같은 2개월을 보낸 이 곳 바기오를 떠나는 버스를 타기 직전까지도 땀을 흘렸다.
이번에는 주말마다 가던 펍과 클럽 사이에 필리핀 로컬 분위기가 나는 그곳에서 신나게 몸을 흔들어 재꼈다. 이곳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는데 쏟았지만 마지막 기억만큼은 2개월간 코피 터질 정도로 공부했던 기억이 아니라 정말 이 곳이 너무 좋고 떠나기 아쉬워서 다음에 꼭 다시 오고 싶은 기억을 담고 가고 싶어서.
"그곳에서 나는 대한민국 30살 백수가 아니었다. 그곳에서 나는 그저 짹슨일 뿐이었다."
시계가 밤 12시가 다 되어간다. 다시 마닐라로 가는 버스가 어학원 앞에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게 될 사람들과 인사를 할 시간이 잠시 주어졌다. 떠나는 시기는 다들 달랐는데 내 동기들 대부분은 3개월에서 6개월 정도 이 곳에 있을 예정이었으니 내가 제일 먼저 떠나게 된 셈이었다.
마지막 날 밤. 이 곳은 군대 훈련소 수료식 상황과 비슷했다. 훈련소에서도 약 7주 가까운 시간을 함께 하면서 다 큰 남자들끼리 헤어질 때 서로 붙잡고 울었던 기억이 있었는데 이 곳은 청춘 남녀가 모여있으니? 훨씬 더 했으리라.
<헤어지는 것에 익숙하지 못한 나>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만 내가 참 유독 유별난 거 같다. 동기들의 바지를 붙잡고 펑펑 운 것은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작별 인사를 할 때마다 마음이 울컥거렸다. 이 곳에 한 달만 더 있을 순 없을까?라는 생각이 떠나는 순간까지도 머릿속을 맴돌았다. (실제로 그렇게 연장하는 사례들이 꽤 있지만) 나의 경우는 더 멀리 정해진 일정대로 움직여야만 했다.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았는데 여전히 안 들어가고 나를 바라보는 동생들이 보였다. 훈련소에서 동기들과 헤어질 때 창문을 열고 "잘 가 이 새끼야"라고 하면서 내 손을 잡고 흐느끼던 동기의 모습과 교차해서 감정이 2배로 복받치는 것만 같았다. 1시간 전까지 잘 흔들어 재끼고 놀고 10분까지 웃으며 인사하던 나는 온 데 간데없었다.
결국 나도 모르게 눈물이 터져 나왔는데 버스 밖에서 내 눈에서 사라질 때까지 인사를 하는 동생들에게 그 모습을 들이기 싫어서 겨우 겨우 참았던 기억이 이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떠 올랐다.
버스는 출발을 했고 마음을 추스리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틀고 밖을 바라보았다.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캄캄한 밤. 그저 달빛과 창문 사이에 비치는 나의 얼굴만이 덩그러니 보였다. 슬프고도 행복했던 필리핀에서 마지막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