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기를 부정하는 사회에서
<EP. 1>
벌써, 2025년도 11월이 찾아들었다. 새해가 시작되고 너무 추울 때는 봄이 오기만을 바랬었고, 봄을 지나 한 여름이 찾아들면 너무 더운 탓에 가을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문제는 지켜내고 싶은 시간까지도 함께 사라지고 없었다. '한 움큼 사라져 버린 내 시간' 아니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주어진 이 시간은 지금 이 순간에도 조금씩 사라져 가고 있다.
<EP. 2>
퇴근길, 문득 지하철 창문으로 반사되는 내 얼굴을 보았다. 어딘가 쭈글쭈글 해 보이는 내 모습이 조금 낯설게 느껴진다. 드문 드문 다른 사람을 보고 있는 것만 같다. "아, 내게도 노화라는 것이 찾아들었구나" 애써 웃어 보이려고 하지만 그래도 아저씨 같은 모습을 감출 수가 없다.
이 두 문장은 꽤나 상반되는 시야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어떤 날은 그저 춥고 덥다는 이유로 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길 바라는 자아와, 동시에 겹겹이 쌓여 버린 시간 속에서, 조금씩 변해가는 내 모습에 괜스레 속상함을 느끼는 전혀 다른 두 자아의 충돌.
재벌과 평민의 공통점
이따금, 재벌 2세처럼 태어날 때부터 모든 걸 가진 사람들과 내 모습을 비교할 때가 있었다. 특히 돈과 관련된 부분에서 자존감이 무너질 때면, 괜히 잘못 없는 세상을 탓하기 바쁠 뿐이었다. 그러나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것이 하나 있었다. 그건 다들 알고 있는 시간이라는 존재이다.
어쩌면 시간과 죽음이라는 존재는 불평등한 사회에 조금이나마 균형을 맞추기 위해 신이 만든 유일무이한 선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후 조금은 위로가 되었다. 어쨌든 새해가 되면, 이재용도 한 살을 먹고, 나도 한 살을 먹으니까.
하지만, 정작 문제는 사회 현상이다. 최근 대한민국은 부의 격차뿐 아니라, 나이 드는 것 자체를 불편해하는 분위기가 감지된다.
더 나아가 새로운 갈등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것 같다. 필자는 많은 나라는 아니지만 다양한 문화권의 나라를 방문하고, 살아보면서 느낀 점이 있다면, 유독 한국은 나이라는 굴레에서 억압된 것 같은 느낌을 종종 받곤 한다. 그러나 그저 노화는 자연의 순리이고 그것은 거부할 수 없는 영역이기에, 나는 그 순리에 적응하며 살아가기로 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먹게 된 계기 이면에는 아래와 같은 상상력이 한몫을 했다.
"노화가 긴 시간에 걸쳐 천천히 찾아오는 것은, 인간들이 너무 큰 충격을 받지 않도록 신이 일부러 긴 시간에 나눠서 주시는 것이야."
"동화책에서도 공주가 하루아침에 마귀할멈이 된 모습을 보면 충격받잖아. 그래서 노화가 천천히 오는 것은 감사해야 할 일이야."
라고 말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거울을 보면서 웃어 본 뒤에 하루를 시작한다. 서글플 일은 없다. 이는 앞서 말한 것처럼 그 누구도 비켜갈 수 없는 삶의 순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이를 받아들일 '감정의 준비' 또한 끝나있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어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
내면이 충족되면, 행복은 자연스럽게 찾아든다.
어쩌면, 행복은 그런 것 같다. 노화로 인해 찾아오는 변화에 대해서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내면을 끊임없이 단련해서 부러지지 않을 선택받을 수 있는 단 하나의 게임 속 주인공이 마지막에 손에 얻어내는 영웅의 칼이 되는 것. 그것이 내가 노화로 속상할 때 대체되는 작은 기쁨이기도 하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진짜 어른이 되었다.
결국 내 삶이라는, 오롯이 나만이 말할 수 있는 서사가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오감으로 느낄 때, 나이를 먹는 것이 오히려 짜릿하게만 느껴진다.' 나도 모르는 사이.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시간이 쌓인 것이다. 그러한 경험들은 어느덧 이해가 가지 않던 어르신들의 고집도 이해해 보려고 노력하게 되는 여유도 생겼다. 이제는 서늘하기만 하던 칼은 어느새 부드러움이라는 감정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심 나이를 먹는 것이 오히려 짜릿하게만 느껴진다.'
지금보다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까?라는 상상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