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花,野花
"아빠 나 사랑해? 그럼 이 귤 까줘"
여자친구는 성인이 된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아빠라는 단어를, 주말 아침 느긋하게 세수하는 아이처럼 하는 사람이었다. 이로 인해 평소 그녀가 가족을 대하는 태도와 성향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동시에 내 마음 한편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이 같은 모습이 사랑스럽고 귀여우면서도 그 감수성이 정말 아이처럼 거꾸로 흘러가는 것은 아닐까 싶어서 내심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귤 정도는 스스로 까먹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연애 회로를 가지고 있었던 나 자신에게 불안감이 드리웠다.
문득, 이런 사람과 같이 살면 행복하게 웃을 일이 조금 더 많아질 것 같으면서도, "앞으로 저 과제는 평행 내 것이 되겠구나"라는 두 번째 걱정이 함께 일었다.
물론, 싫은 것이 아니었다. 그저 나라는 사람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행동이 낯설고 어색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내게 귤이라는 과일은 당연하게도 직접 까먹어야 하는 과일이었으니까.
참, 별거 아닌 것에 생각이 많아진다.
마음이 늙지 않는 감수성 충만한 소녀에게 꽃의 이름을 붙여주어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온실 속 화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에 반해 나는 들꽃 같은 야생화였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단 한 번도 내게 "오빠 나 사랑해?"라고 물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돌이켜보면 내가 먼저 말해주길, 기다리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문득 "그녀를 좋아하지만, 사랑은 하지 않는 걸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지만 그런 건 아니었다.
좋아하는 감정이 곧 사랑이라고 생각해 왔으니까, 사람이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것처럼, 좋아하면 사랑하고, 사랑하면 당연히 결혼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좋아만 할 거야! 사랑까지는 안 할 거야! 누가, 이런 감정의 경계를 구분 지을 수 있을까?
하지만 표현이 없는 관계는 느슨해질 수밖에 없다.
마감 기일이 생산성을 키워주는 것처럼 목적 없는 글이 3류 소설이 되는 것처럼,
표현 없는 관계는 쾌락적인 의무감만 찾는 한 겨울에 다 젖어버린 장작 같은 것이다.
'허허벌판에서 거대한 자연과 맞서 싸워 살아남은 야생화'
길가에서 누가 물 하나 주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는, 그래서 누군가는 잡초라고 부르며, 뽑아내지만 끊임없이 다시 자라나는 존재.
그렇게 메마른 땅에서 비바람을 이겨내는 법은 배웠지만, 정작 온실 속 화초에 물 주는 방법은 전혀 몰랐다.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물을 주는 법을 깨달았지만'
"문제는 그 꽃은 더 이상 내 곁에 없었다."
그렇게
이별이 남긴 마음의 화재는 어느덧 진압되었지만, 여전히 크고 작은 불씨들은 남은 듯하다.
모든 것이 다 타 버려서 이제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녀가 남기고 떠난 순수함은
시간이 흘러도 멈춰 있는 것 같다.
어쩌면, 이별의 통증은 "결코 늙지 않는 감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