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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가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

by 갓기획

친한 형과 술자리가 있었다. 형과 나는 둘 다 ‘딸바보’라는 치명적인 약점이자 공통점이 있어서 평소 이야기가 잘 통한다. 서로가 얼마나 호구이고, 딸을 사랑하는지를 안주 삼아 소주병이 쌓여간다. 그러던 중 내가 말을 꺼냈다.


“형… 나는 지금도 우리 딸(초딩 3학년)이랑 안고 자는 게 너무 좋은데…이제 곧 그럴 날도 다신 안 온다고 생각하니까 왠지 슬프다”


내가 생각해도 지독한 딸 바보에 호구 아빠다. 그런 나를 보고 형이 위로를 건넨다.


“다 크는 과정이야. 근데 지금 그렇게 잘해 놓으면 나중에도 친하게 잘 지내. 특히 사춘기 때, 진짜 말도 안 하고 힘든데. 지금 그렇게 잘해 놓으면 그나마 낫지. 주변에 보니까 커서도 아빠랑 잘 지내고 그러더라”


이 말을 시작으로, 형의 입에서는 딸과의 대화법부터 사춘기 딸을 대하는 방법까지 이미 산 넘고 물 건넌 이야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나는 단지 딸과 안고 자는 게 좋고, 이제 곧 그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아쉬움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형은 나를 위로한답시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줬다. 하지만 형이 말하는 내내 나는 내 감정에 취해서 형이 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듣고 싶은 말은 그게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어떤 말이 듣고 싶어서 그런 얘기를 한 것이 아니었던 것 같다. 단지,


‘그냥 내 기분이 그래. 그냥 이해해줘, 알아줘, 들어줘’


라는 감정 표현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내 감정에 형은 위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조언과 충고를 해오고 있었다. 물론 형은 나를 위로하고 싶은 마음으로 꺼낸 말들이었지만, 왠지 내가 느끼기에 형의 말 저변에는


‘내가 다 해봐서 아는데…’ 가 깔려 있는 듯 했다.


그래서 였을까? 어떤 위로가 전해지기보다 듣기 싫은 잔소리와 충고로 들렸다. 나는 위로가 필요했던 것뿐인데 말이다. 차라리 그냥,


“그렇구나. 딸과 안고 자는 거 참 기분 좋은 일이지. 시간이 지나면 그럴 날이 안 온다고 생각하니 아쉽겠다”라고 내 감정에 공감하는 말로 끝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가끔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사람들은 너무 쉽게 자신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위로하려고 든다.


“괜찮아 잘 될 거야”


‘나는 괜찮지 않은데 뭐가 괜찮다는 걸까?’

‘무슨 근거로 잘 된다고 한다는 거지?’


어쩌면 ‘괜찮아 잘 될 거야’는 세상에서 가장 쉬운 위로의 말이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가장 무책임한 말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진심으로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 본다면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다. ‘내가 다 해봤으니까’, ‘네 말 더 듣지 않아도’, ‘아니면 나도 내 고민으로 바빠서 그 말 밖에 해줄 수 없다’는 의미만 전달된다. 물론 충분히 좋은 의도를 가지고 한 말이겠지만, 때로는 그저 허공에 울리는 허울 좋은 메아리로 들릴 뿐이었다.


사람들이 헷갈리는 감정 중에 하나가 ‘동감’과 ‘공감’이라고 한다. 두 감정 모두 상대방을 이해하려는 시도라는 점에서 관계의 질을 높이는 좋은 방법이지만, 둘 간에는 큰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출발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동감은 내 입장에서 그 사람의 의견에 동의하고, 그 사람과 같은 감정을 느끼는 것이다. 내 지식과 경험 안에서 판단하고 상대방의 의견에 동조하는 방식이다. 반면 공감은 일단, 내 입장을 내려놓는다. 철저히 상대방의 입장이 된다. 그 상황과 경험으로 훅 들어가서 그 사람이 느꼈을 감정과 생각을 고민한다. ‘나라면’에서 주어를 너로 바꿔서 ‘너라면’이라는 고민을 시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영화를 보고 '슬펐다' 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렇지 그런 영화 보면 슬프지”


라고 말하는 건 동감하는 것이고,


“아 진짜 슬펐겠구나”


라고 말하는 건 공감 아닐까?


물론 사람에 따라 느끼는 바는 충분히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동감하는 능력보다 상대방의 마음에 진실되게 다가가려는 공감이 조금은 더 어렵다는 점이다. 그냥 가볍게 맞장구치거나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진심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 수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입에서 내는 소리가 아니라 마음에서 내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오래 전 직장에 다닐 때, 선후배들과의 어느 술자리가 기억난다. 연말 인사평가 결과가 발표되고 그중에 C를 받은 친구가 있어서 그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마련된 술자리였다. 그 친구의 불만과 하소연이 이어지고, 이제 우리가 한 마디씩 위로를 건넬 차례다.


“괜찮아 다음에 더 잘하면 되지…”

“힘든 일이 있어야 성장하지”

“네가 운이 나빴네. 재수 없었다고 생각해. 내년에는 잘 주겠지”


나쁘지 않은 멘트와 위로였다. 그 친구의 얼굴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한다. 그때였다. 한 선배가 나지막이 이렇게 말해온다.


“나도 C 받은 적 있었어. 많이 힘들겠다 너..”


나는 다른 사람들의 말보다, 왜 그 선배의 그 말이 더 진정성 있는 위로로 느껴지고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것일까?


어쩌면 진짜 위로란 내 입장에서 뭔가 그 사람을 위해 좋은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닌지도 모른다. 그냥 그 사람이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알아주는 것이 진짜 위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 사람과 같은 입장에서, 같은 선상에서 마음의 소리로

‘그렇구나. 힘들겠구나… 슬펐겠구나’


라고 그 사람의 마음속에 내 말을 담그는 것, 이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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