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을 배려하는 언어
가끔 아무 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쓰는 말이지만, 때론 그 말을 듣는 사람에게 공격적인 의미로 다가가는 말이 있다. 하는 사람은 별 뜻 없이 하는 말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상처가 된다. 차라리 입 밖으로 꺼내지 말고 넣어두면 좋을 말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어떤 일의 결과가 좋지 못하거나, 상대방이 뭔가 실수를 했을 튀어 나가는 말이다. 안타까움의 반영이고, 상대방의 상황에 공감하는 듯한 표현이지만,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하고 상처가 되는 말이다. 도대체 뭐가 그럴 줄 알았다는 건지, 진짜 알았으면 진작에나 말해줄 것이지 이미 일이 벌어지고 난 뒤에 꼭 예언자를 자처하며 잔소리를 시작한다. 선견지명은 없으면서,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후견지명을 마치 대단한 능력인양 과대 포장한다. 사후 확증 편향에 제대로 빠져있는 사람이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의 가장 큰 문제는 과정이 아닌 결과를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비록 결과는 좋지 않았지만, 필연 그 안에는 그 사람의 노력과 자존감 등의 과정이 담겨 있는데, 여기에는 관심이 없다. 그냥 결과만 보고 모든 것을 해석해서 판단해 버린다. 이 모든 것이 응집되어 나가는 한 마디가, 바로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말하는 것에는 '기본적 귀인 오류'가 한몫 거든다. 기본적 귀인 오류는 뭔가 잘못된 상황에서 자신의 경우에는 상황탓을 하는 반면, 타인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기질 탓을 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일이 일어난 배경,상황,여건 등의 요소를 무시하고, 그 사람의 내적 특성으로 귀인하는 오류이다. 한 마디로, 모든 실패의 이유를 그 사람에게 돌리고 몰아세우는 것이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나가는 한 마디가, 바로
“내가 너 그럴 줄 알았어”
차라리 진짜 위로를 하고 싶거나 조언을 하고 싶다면, 첫 마디를 이렇게 꺼내고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네가 정말 그랬어?”
“나라도 그랬겠다.”
~나 하자
여기서 문제가 되는 단어는 딱 하나, ‘~나’라는 조사이다. 이 단어 하나를 붙이면 말의 뉘앙스가 확 바뀐다. 보통 이렇게 ‘~나’를 쓰는 경우는 원래 하고 싶었던 A라는 대안을 실행할 수 없을 때 마지못해 B를 선택하는 경우다. '~나'라는 단어에 ‘마지못해’ 또는 어쩔 수 없이’라는 의미가 담긴다. 예를 들어, 뭘 제대로 먹기에는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딱히 먹을 게 없을 때 보통 이렇게 말한다.
“김밥이나 먹자.”
혹시 김밥이 이 말을 들었다면, 김밥의 기분은 어떨까? 밥도 아니고, 그렇다고 면도 아닌 한 끼 식사로서 가치 없는 자신의 존재 의미를 한탄하지는 않았을까? 관련해서 학창 시절 축구를 좋아하고 누구보다 골 욕심이 있었던 나에게 축구를 좀 한다는 친구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너는 수비나 해줘.”
그냥 차라리
“너는 수비 좀 해줘”
라고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랬으면 지금 어느 동네의 조기 축구회에서 활동하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이후 축구공을 차 본지가 언제 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단 한 글자 차이지만, 작은 조사 하나 차이에서 일의 가치나 상대에 대한 존중감의 의미는 180도 바뀐다. 특히 일적인 상황에서는 ‘~나 해 ’는 상대방을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때론 모욕감까지 주는 말이 될 수도 있다.
“너는 그거나 해.”
“너는 회의실 세팅이나 좀 해라.”
이 말의 의미에는 ‘그깟 하찮은 일은 네가 좀 해, 딱 니 수준이야’라는 전제가 깔린 것은 아닐까?
이 역시 넣어두면 좋을 말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라~~
후배 중에 말을 할 때, 습관적으로 ‘그게 아니라’를 입에 붙이고 말을 시작하는 친구가 있다. 가끔 다급한 상황에서는 ‘아니’라고 짧게 말하고 시작하기도 한다.
“그게 아니라, 내 말은…”
“아니.. 내가 버스를 타는데…”
물론 아무의미 없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지만, 때로는 어느 정도 자기 방어적 의미와 상대방의 의견을 무시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너무나 완벽한 사람, 또는 너보다 나은 사람인데 그게 무너졌을 때,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튀어나가는 말이다. 물론 진짜 억울하고 불가피한 이유가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경우라도 먼저 상대방의 말을 인정하는 습관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 근데 사실은 말이야.”
“그러네, 네 말도 일리 있다. 그리고 이런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이런 사람들은 뭔가 자신이 모를 때도 그냥 아는 척 넘어간다. 이 역시 자존심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끼어들어 '모른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관련해서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한 가지 있다. 어떤 연예인이 tv 프로그램에서 연기 학원을 찾아갔다. 이때 강사가 학생들에게 개구기를 입에 물리고 발음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여러분 이 개구기를 이용해서 입을 크게 벌리고 대사를 하면 발음이 정확해집니다.”
하지만, 이 연예인은 개구기를 모르는 눈치다. 하지만 질문을 하지 않는다. 자신은 이미 성공한 연기자이기에 그걸 모른다는 사실에 안량 한 자존심이 반기를 든다. 쉬는 시간, 그 연예인이 후배들에게 다가가 이렇게 조언한다.
“학생들. 개구리 끼고 발음하는 거 많이 불편하시죠? 하지만 개구리를 입에 끼고 발음 연습을 해야 나중에 도움이 됩니다. 개구리 꼭 활용하세요”
아무래도 '개구기'를 '개구리'로 잘못 알아듣고 오해한 듯싶다. 졸지에 학생들은 개구리를 입에 물고 발음 연습을 하는 사람들이 되어야만 했고, 그 연예인은 학생들에게 개구기를 모르는 선배가 아니라, 모르는 걸 모른다고 인정하지 않는 꼰대로 인식되지는 않았을까? 차라리 '여러분 입에 끼고 하는 게 뭐예요?'라고 질문했으면 어땠을까? 모르는 걸 모른다고 말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모를 땐 모른다고 하자. 상대방은 세워주고, 나는 정확한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솔직하게 인정하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낀다고 한다. 여기에 더해 자신의 실수나 부족한 부분을 인정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신뢰감까지 줄 수 있으니, '모른다' 라은 말을 굳이 아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사랑을 정의하면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랑은 상대방이 원하는 행동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랑은 더하기가 아니라 빼기의 기술이라는 의미라고 생각해 봤다. 말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어떤 말을 더 할까, 어떻게 해야 말을 잘할까'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말을 하지 않아야 할까, 어떤 말을 뺄까'를 고민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런의미에서 다시 한번 반복한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은 그냥 넣어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