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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갓기획 Jan 15. 2020

제80화: 아빠는 딸, 꼰대는 요즘것들

위기의 꼰대, 꼰대 탈출 넘버원

요즘 우리 가족의 취미이자 정례 행사로 자리 잡은 일이 하나 있다. 토요일 밤이 되면 어김없이 마루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어 영화 한 편을 보면서 잠드는 일이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는데, 어느덧 10살이 되어버린 딸아이와 12세 관람가 정도는 같이 볼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물론 액션이나 성인물을 선택할 수 없다는 한계는 있지만, 딸아이와 함께 같은 영화를 보며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충분하다. 매주 토요일 저녁이 되면 오늘은 어떤 영화를 볼까 딸아이와 함께 고민하는 시간은 소소한 행복이 된다.  


그렇게 어김없이 토요일 저녁이 찾아오고, 고심 끝에 고른 오늘의 영화는 2017년 개봉한 영화 ‘아빠는 딸’이었다. 배우 윤제문 씨와 정소민 씨가 출연한 영화로, 40대 중반의 아빠와 고등학생 딸의 몸이 서로 바뀐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인 body change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 영화의 스토리는 개연성이 떨어진다.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답게 아빠와 딸의 몸이 갑자기 바뀐다는 설정은 억지에 가깝다. 하지만 이런 비현실성을 감안하더라도 그 안에서 충분한 재미가 발산된다. 40대 아저씨가 딸의 몸을 하고 고등학교 생활을 하는 모습이나 철없는 고등학생이 아빠의 몸을 하고 회사에서 과장으로 살아가는 모습에서 웃음 포인트가 만들어진다. 10살 배기 꼬맹이를 제대로 취저하며 빵빵 터트린다. 아무 생각 없이 보기 딱 좋은 킬링 타임용 영화다.


그렇게 토요일 밤의 영화 상영이 끝나고 행복하게 잠자리에 드는데,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단순히 웃고 끝나는 킬링 타임 영화인 줄 알았는데, 영화 속 대사들과 장면들이 스쳐가면서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3가지 측면에서 그 의미를 정리해본다.  


첫째, 내 입장과 기준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자.


영화 속에 아빠는 평소 도무지 성적이 오르지 않는 딸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거 하지 말고 공부만 해. 그 쉬운 걸 왜 못해?’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아빠는 딸의 몸을 하고 첫 시험을 치르게 된다. 아빠는 시험 전날 딸에게 자신 있게 이야기한다.


"아빠가 보여줄게. 공부가 얼마나 쉬운지."


그러나 그 결과는 참혹했다. 거의 꼴찌에 가까운 성적이었다. 오히려 더 바닥으로 떨어졌다. 비참한 마음에 딸의 몸을 한 아빠는 정신과 친구를 찾아가서 하소연을 한다.


“막상 시험 보니까, 요즘 애들 공부 너무 어렵더라”


그랬더니 돌아오는 친구의 대답이 기가 막히다.


“야 우리 때도 어려웠어”


이 대사가 묘하게 뒤통수를 친다. 정확히 맞는 말인데,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은 말이기 때문이다. 맞다. 분명 우리 때도 어려웠다. 하지만 언젠가부터 착각을 하고 살았는지도 모른다. 아빠도 학창 시절이 있었고, 그때도 어렵게 공부를 했는데 지금은 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반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는 어려웠던걸 지금은 왜 쉽다고 생각할까?'


 영화에서 가장 임팩트 있는 장면이었다.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과거의 경험이 희미해진다. 그리고  희미해지는 기억 속에서 과정보다 결과를  기억하게 된다. 힘들었고 고통스러웠던 과정보다는 해냈다는 결과에 포커스를 맞춘다. 여기에 지식의 저주가 끼어든다. 지식이 쌓이고 경험이 많아질수록, 그렇지 못한 때의 기억을 잊는 현상이 벌어진다. 쉽게 말해 개구리가 올챙이 적 시절을 떠올리지 못하는 현상이 만들어진다. 자신에게는 쉽거나 익숙한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어려울 수도 있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고려하지 않게 된다. 여기서 부터 이해가 막히게 되고, 소통이 단절된다.


둘째, 내가 가져보지 못한 책임감의 무게를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이번에는 딸의 이야기이다. 아버지의 몸으로 회사를 다니게 된 딸에게 아빠가 바라는 것은 딱 한 가지이다.


“절대 책임지겠다는 말을 하지 마”


직장 생활의 단면을 잘 보여주는 뼈 때리는 대사였다. 하지만 철없는 딸이 그 말의 ‘제대로 된’ 의미를 알 리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회장님을 앞에 두고 진행한 PT에서 제품이 잘 되지 않으면 책임지겠다는 말을 내뱉고 만다. 그 대가는 참혹했다. 아빠를 포함한 부서원 전원의 정리해고였다.


딸은 맥락상 맞는 말을 했고, 정의롭고 호기로운 태도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사회가 꼭 그런 것 만을 수용하지는 않는다. 때로는 자신의 의견을 굽혀야 하는 상황도 있고, 자존심 다 내려놓고 기어야 하는 순간도 있다. 하지만 아직 사회생활 경험이 없는 딸이 거기까지 생각하는 것은 한계였다. 결과적으로 아빠의 삶을 망치는 결과를 만들어 냈고, 그 과정에서 깨달음이 이어진다. 사회는 생각보다 차갑고 잔인한 곳이었다. 이상과 현실이 철저히 다른 세계였고, 치기 어린 생각으로 들이받다가는 어떻게 된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동안 아빠가 느꼈을 좌절과 책임감의 크기를 깨닫게 된다.


때로는 상대가 짊어지고 있는 짐이 가벼워 보일 때가 있다. 내가 지는 짐의 무게는 무겁게 느껴지는데, 상대방의 등에 있는 짐은 가벼워 보인다. 그래서 쉽게 판단하고 말한다. ‘별것 아닌데’, ‘왜 저렇게 까지 해’, ‘왜 저래’ 등으로 내 기준으로만 판단한다. 하지만 절대 그 짐을 짊어지기 전까지 그 무게를 판단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무게가 있고, 저마다의 책임감이 있을 뿐이다.  


셋째, 때로는 기다려주고, 상대방의 편에 서주자.


마지막으로, 다시 아빠의 입장으로 돌아온다. 영화 전반에 퍼져 있는 아빠의 태도는 조급함이다. 딸이 마음을 열고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무슨 고민을 하는지, 아빠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려고 노력하기 전에 무조건 자기 생각만을 강요한다. ‘아빠는’, ‘아빠 때는’, ‘아빠라서’ 등으로 시작하는 대화법에 딸은 그저 헤드폰으로 귀를 막을 뿐이다. 그러다 영화 마지막에 서로의 입장을 이해하고 아빠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조심스레 자신의 바람을 전해온다.


“아빠 항상 고맙게 생각해. 그리고 내가 아빠한테 바라는 것은 딱 하나야. 다른 방향에서 가르치려 들지 말고, 같은 방향에서 내가 하는 고민을 같이 해줬으면 좋겠어.”


영화 ‘아빠는 딸’의 이야기 구조는 부녀 갈등이나 세대갈등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 갈등의 모습은 이 시대 존재하는 많은 갈등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부부간 갈등 고부/장서 등의 갈등, 직장 내 세대 갈등 등의 모습과 닮아 있다. 그리고 유형은 다르지만, 결국 갈등의 본질은 하나라고 생각한다. 갈등이 시작되는 원인은 어느 정도 한 뿌리에서 시작된다.


-자신의 경험 안에서 판단하는 

-자신이 맞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대방이 변하길 바라는 


이는 결코 역지사지 만으로는 풀 수 없는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이해에 그쳐서는 해결이 안 된다. 그 마음이 전달되어야 한다. 마음을 표현해야 전달이 되고, 해결의 실마리가 생긴다. 마음으로만 하면 금방 까먹고 그러다 다시 깨닫고를 반복할 뿐이다. 차라리 말로 내뱉는 것을 생활하 하면서, 언어적인 습관을 만드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내 생각을 말하기 전에  생각은 어떠니?’라고 물어주고, ‘그건 아니지’라고 선을 긋기 전에 그럴 수도 있겠네라고 인정해 주고, ‘이렇게 저렇게 해’라고 말하기 전에 네가 원하는 대로 해봐 응원해라고 말해 보는 것은 어떨까?


그렇게 영화가 끝나고 한 가지 의문이 남았다. 왜 영화 제목이 ‘아빠와 딸’이 아니고 ‘아빠는 딸’이라고 했을까라는 것이었다. 아빠가 딸이 되고, 딸이 아빠가 된 것인데, 왜 아빠와 딸을 병렬로 표현하지 않고 ‘아빠는 딸’이라고 했을 까라는 소소한 의문이 남아있었다. 아무리 찾아봐도 이 영화의 제목에 대한 의미는 나와있지 않았다. 오랜 고민 끝에 작의적으로 내가 해석해 봤다.


아빠는 이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아빠는  이해할  있다


정도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물론 딸도 아빠의 입장을 이해하고 다가가려는 노력을 해야 하지만, 가보지 못한 세계, 경험하지 못한 일들이기에 분명 한계는 있을 것이다. 반면 아빠는 좀 더 쉽지 않을까? 이미 경험해 본 일이고, 그래서 조금만 노력한다면 충분히 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먼저 다가가라는 의미로 아빠는 딸이라는 제목을 정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아빠는 딸에서 ‘아빠’와 ‘딸’이라는 단어의 자리에 ‘꼰대’와 ‘요즘 것들’을 대입해 본다. 그리고 직장 내에서도 세대갈등 해결을 위한 영화 같은 일이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그 영화의 제목을 이렇게 정해 본다. ‘꼰대와 요즘것들’이 아니라 ‘꼰대는 요즘것들’ 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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