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10년 했으니 책 좀 쓰라고 해서 쓰는 이야기 #3
"우리 독서모임 한 번 해볼래?"
예고도 없이 보낸 뜬금없는 문자였다. 단 한 번도 책을 읽는 모습을 보인 적 없었던 사람이었으니 예상조차 할 수 없었겠지. 고민 할 법도 했겠지만, 별다른 질문 없이 문자를 받은 후배들에게서 ‘하고 싶어요’라는 회신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우리 독서모임 한 번 해볼래?’ 라는 한 문장에 담아 보낸 설렘이 걱정과 불안으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었다. 겨우 독서모임 참관 한 번 해본 놈이 독서모임이라는 판을 깔아버렸으니. ‘야, 니가? 독서모임을 한다고?’ 불쑥 튀어나온 혼잣말에 ‘피식’하고 헛웃음이 나왔다. 어쩌겠는가. 후회하기엔 이미 늦어버렸고, 내게 남은 선택지는 어떻게든 벌어진 상황을 수습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망하지만 말자’라는 소박하지만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목표를 세우고 첫 만남을 준비했다.
한 주의 시작을 열겠다는 마음으로 진행 요일은 월요일로 잡았다, 기존에 참여 중인 다른 활동에 지장을 주지 않으면서 병행 할 수 있는 시간을 찾다보니 아침 7시가 되었고, 그 시간에 이용 할 수 있는 공간은 학교 앞 맥도날드와 던킨도너츠 2곳이 전부였다. 맥모닝보다는 다양한 메뉴 선택지가 있는 던킨도너츠로 장소를 결정했다. 서면 던킨에서의 좋았던 기운을 이어가고 싶은 작은 바램도 있었다. 그렇게 매주 월요일 아침 7시, 학교 앞 던킨도너츠 2층에서 우리는 책모임을 시작했다. 이왕 모임을 시작했으니 모임명이 필요했고 ‘생각’의 순 우리말인 ‘혜윰’이라는 이름을 선택했다. 나의 권유이긴 했지만 가볍게 이 모임에 왜 참여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읽고 싶은 책 리스트를 공유했다. 백지 상태에서 시작했지만 함께 한 동생들 덕분에 다음 모임을 기다릴 수 있게 되었다.
돌이켜보니 그때의 나는 닫혀있는 관계에 대한 염증을 앓고 있었던 것 같다. 수학이라는 전공의 특성상 교직이수, 교육대학원, 또는 금융권에 취직을 하기 때문에 학교 수업 또는 자격증 취득 외에는 학교 밖 생활에 대한 필요를 크게 느끼지 못한다. 나 역시 전공이 정해놓은 길을 걸었던 시간도 있었지만 1학기 만에 포기하고 말았다. 수험생 생활을 다시 반복하긴 싫었고, 실력도 부족했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위기감을 느낀 나는, 익숙함 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대외활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되었다. 생존본능이었다. 대외활동이라는 낯선 환경 속에서 맺게 된 관계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새로운 것들로 가득했고, 정답이 아닌 우리들만의 해답을 찾아내야 하는 프로젝트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잃어버렸던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고, 어느덧 내 삶의 무게중심은 학교 밖 생활로 바뀌어버렸다. 익숙했던 학교생활은 어느새 낯선 것이 되고 말았다.
그즈음 학과 후배들과 독서모임을 시작한 것이다. 별로 특별한 만남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진 않았다. 이 관계는 이미 익숙한 것이었으니까. 후배들은 학교생활만 열심히 하는 아이들이고, 나는 학교 밖에서 새로운 것을 많이 보고 배우고 있으니 멋진 선배 코스프레도 가능할 것 같았다. 서면 던킨에서 동경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분들처럼, 나 역시 그런 모습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상상도 해봤다. 이땐 몰랐다. 첫 모임을 마친 뒤 내가 얼마나 초라하게 바뀔지.
첫 모임의 선정도서는 최인철 교수의 「프레임」 이었는데, 책이 전하는 메시지처럼 내가 세상을 얼마나 편협한 시선으로 해석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이라 생각했던 이들에게서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삶의 경험이 펼쳐졌고, 내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사고의 깊이 앞에서, 나는 이내 자세를 바로 잡고 동생들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시작했다. 결정적인 순간에 사용하기 위해 애써 외워두었던 멋진 명언도 있었는데 도로아미타불이었고, 겨우 내뱉은 한마디는 대화의 맥락을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대화를 진두지휘하며 적재적소에 유머와 임팩트 있는 멘트를 통해서 노련한 선배의 모습을 뽐내는 상상이 사치였다는 것은 단 한 번의 모임을 통해서 증명되었다. 동생들을 후배라는 프레임 안에 가둬놓고 있던 나의 태도를 바꿔야만 했고, 이 모임을 마친 뒤 그들은 나와 같은 20대 대학생일 뿐이었다.
다들 9시에 시작하는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8시 30분에 모임을 마쳤다. 길에는 새학기를 맞이하는 수많은 학생들로 가득 차있었다. 우리도 이내 그 혼란 속에 몸을 맡긴 채 학교 정문을 지나 수학관으로 향했다. 기대를 채워주지 못했다는 자책에 의기소침해 있었고, 과연 다음 모임에는 몇 명이 나올까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옆을 보니 나와는 다르게 동생들의 얼굴은 한껏 상기되어있었다. 월요일 아침의 피곤함이 묻어나는 다른 학생들의 모습과는 달랐다. 즐거웠고, 재미있었고, 다음 모임이 기대된다고 했다. 학교 생활하면서 이렇게 편하게 자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처음이라고 했다. 입에 발린 말이라 치부하기엔 그들의 표정에서는 빛이 나고 있었다. 내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이 만남에서는 굳이 내가 선배라고, 리더라고, 이들을 이끌고 나가야 한다는 필요 없는 책임감을 느낄 필요 없이 또 한 명의 참가자로 동등한 위치에서 대화에 참여해도 된다는 것을 그들이 알려줬다. 그 순간 4년 동안 다니면서 한껏 익숙했던 교정이 달리 보이기 시작했고, 강의실로 들어서자 과거에 붙잡힌 대화만 반복했던 이들에 대한 새로운 호기심이 생겨났다. 괜히 방학동안 뭐하고 지냈냐며 먼저 안부를 물으며 말을 걸기 시작했다. 이런 변화가 「프레임」 이라는 책을 읽고 관점의 이동에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고작 독서모임 한 번 했을 뿐인데 내가 생각해도 호들갑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이런 호들갑이라면 언제라도 환영이다. 그렇게 나는 착한 동생들 덕분에 운이 좋게도 ‘독서모임 하는 사람’의 첫 발을 기분 좋게 내딛을 수 있었다. 다음 책 모임이 기다려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