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모임 10년 했으니 책 좀 쓰라고 해서 쓰는 이야기 #5
얼떨결에 독서모임이 매주 월요일 아침마다 진행되는 학과 행사처럼 되어버렸다. 아침 9시 수업에 잠이 덜 깬 눈을 부비며 시간에 쫓겨 허겁지겁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편안하고 여유있는 모습으로 20여명의 학생들이 함께 등교를 하는 모습은 사뭇 색달랐다. 학교로 향하는 무리의 제일 뒤에 서서 후배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괜히 뿌듯하면서 입가엔 미소가 지어졌다. 학과에 이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이 눈으로 보면서도 믿어지지 않았다. "우리 독서모임 해볼래?"라는 한 마디가 만들어 낸 나비효과는 상상이상이었다. 하지만 회차가 지나면서 내면에는 작은 아쉬움들이 쌓이기 시작했다.
새로 가입한 이들끼리 모임을 진행 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기존 모임의 멤버들이 나눠져서 각 모임의 진행을 맡게 되었다. 나 역시 새로운 모임의 리더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새로운 친구들과 책으로 소통 할 수 있다는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분명 자기 의지로 모임에 참여했지만, 기존 멤버들과는 모임에 대한 열정과 참여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멤버들이 있었고, 4학년이라는 고학년이 진행을 하는 것 때문인지 자유롭게 자신의 의견을 얘기하기 보다는 내 이야기를 경청하는 분위기가 형성이 되어버렸다. 이때만 해도 진행이 미숙했고, 양질의 토론을 이끌어내기 위한 논제를 준비하는 기본적인 것 조차 모를 때였다. 진행 중에 침묵이 흐르면 누군가는 이야기를 해야하는데 그 역할은 내가 해야만 한다 생각했었기에 자연스레 말이 많아졌고, 후배들은 선배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모습이 연출 된 것이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자 독서모임이라기 보다는 내가 1시간 동안 특강을 하는 것처럼 되어버렸다. 게다가 같은 전공을 하는 이들의 만남이라 그런지 이야기가 크게 확장되지 않고 자꾸 맴도는 느낌이 들었다. 이는 서로에게 좋을 것이 없다고 판단했고, 개인적으로도 다양한 전공의, 책을 더 많이 읽은 이들과, 조금 더 깊이 있는 독서모임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겨났다.
이미 나의 손은 학교 자유게시판에 '수요일 아침 7시' 독서모임 참가자 모집글을 올리고 있었다. 오후 시간에는 다른 활동으로 인해 일정에 변동이 잦았으므로, 내게 가장 자유로운 시간은 아침 7시었다. 다양한 전공의 친구들과 함께 하고 싶었지만 과연 이 시간에 모임에 참여 할 사람이 있을지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지 않아 공대, 예술대, 인문대, 사회대, 상대 등 다양한 전공으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골고루 분포 된 8명의 참가자가 모집 되었다. 가장 맘에 들었던 것은 내가 최연장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왠지 모르게 심적으로 의지 할 수 있는 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 진행자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 이 때 알게 되었다. 첫 모임은 한 학기 동안 같이 읽고 싶은 책을 한 권씩 추천하며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내가 읽은 책은 단 한 권도 없었으며, <데미안>,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화폐전쟁> 처럼 학과 독서모임에서는 쉽게 추천되지 않았던 고전과 경제 장르의 책을 만날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게다가 이런 책들을 이미 읽고 자신의 이해를 바탕으로 왜 이 책으로 토론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자신의 주장까지 자연스럽게 펼치는 모습을 보면서 나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전공을 가진 이들이 모인 장점을 제대로 알 수 있는 첫 만남이었고, 제대로 준비하고 참여한다면 한층 더 성장을 할 것은 분명해 보였다. 하지만 무엇보다 의미있었던 것은 따로 있었다.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많았던 누나가 있었다. 나이는 28살, 대학원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학부생이었다. 학교에 나보다 나이가 많은 학부생 여자가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마냥 신기했고, 모임에서 의지 할 수 있는 누나가 한 명 있다는 것이 좋았다. 누나는 함께 읽고 싶은 책으로 <그리스인 조르바>를 얘기했다.
"작품 속 '조르바'라는 인물은 그 누구의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기의 주관대로 행동을 합니다. 처음엔 읽으면서 '뭐 이런 개망나니가 다 있나'하는 생각도 했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그 무엇에도 억압받지 않은 채 발언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알 수 없는 부러움과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어요. 나는 그렇게 행동하며 살아오지 못했으니까요. 그래서 '나답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유란 무엇인지, 그래서 지금 나는 내 삶을 살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게 되었답니다. 남들은 지금 다시 대학가서 졸업하면 나이가 서른인데, 여자 서른은 어디가서 신입사원으로 받아주지도 않는다며 그냥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 잘 다니며 경력을 쌓으라 했지만, 조르바를 읽은 저는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다시 대학생이 되어서 공예를 하게 되었어요. 조금이라도 나 다워지기 위해서요. 여러분과 함께 조르바를 함께 읽고 '자기다운 삶'은 무엇인지 '선택의 순간'에 당신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을 했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본다면 좋을 것 같아요."
추천 된 8권의 책 중에서 다수결로 가장 먼저 함께 읽을 책을 정했고, 만장일치로 <그리스인 조르바>가 선택 되었다. 모임이 끝난 뒤 학교 앞 서점으로 가서 책을 살펴보았다. 분량은 482페이지였다. 이때까지 단 한 번도 350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책을 읽어보지 않았었기에 과연 1주일 동안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지 두려움이 앞섰다. 하루라도 늦어선 안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바로 책을 구매했고, 그 자리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곤 나도 그 누나처럼 만나게 되었다. 아직 모태인 대지에서 탯줄이 떨어지지 않은 사나이, 그리스인 조르바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