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다른 몸과 함께 살아가는, 유쾌하고 향기로운 일기

[8화] 괜찮으세요?가 먼저인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by 누다


화장실에서 마주한 존엄의 순간들


■ 언제나 나는 화장실 앞에서 숨을 고른다


밖에 나갈 일이 생기면,
나는 제일 먼저 화장실이 어디 있는지부터 확인해요.


사람들은 흔히 목적지를 먼저 생각하지만,
장루를 가진 내게는 화장실의 구조와 위치,
그리고 사람이 많지 않을 시간대까지가 외출 준비의 시작이에요.


어쩌면 내게 화장실은 장소가 아니라 감정이에요.
눈치, 걱정, 불안, 그리고 때로는 수치심까지.
단순한 공간에 들어서는 일인데,
마음은 하루 종일 준비운동을 하듯 긴장해 있죠.


■ 그날, 나는 또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며칠째 장이 편치 않았어요.
장루 주변 피부는 헐어 있었고,
붉게 피가 맺혀 조금만 건드려도 따갑고 아팠어요.


그날은 연휴였고,
남편이 근교라도 다녀오자며 조심스레 권했죠.
“오랜만에 바람 좀 쐬고 오자”는 말에,
마음 한켠 무거운 걸 알면서도 따라 나섰어요.


그리고 결국… 일이 터졌어요.

급하게 들어간 공중화장실.
좁고, 파우치를 둘 선반도 없고,
세면대는 멀찍이 떨어져 있었죠.


나는 그 안에서 쭈그려 앉아
어떻게든 수습하려고 애쓰고 있었어요.

그때—
문 밖에서 노크 소리.
한 번, 두 번,
그리고…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그 말에
나는 그저,

“죄송합니다…”


그 말밖엔 할 수 없었어요.
식은땀이 났고,
마음이 철렁 내려앉았고,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어요.


그저 나도 볼일을 보고 있었을 뿐인데,
그 한마디가 나를 투명하게 만들어버렸어요.


■ 그 문 두드림은 단순한 노크가 아니에요


사람들은 가끔 말하죠.
“그냥 노크일 뿐이잖아”라고요.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 문 두드림이
존엄을 흔드는 소리가 될 수 있어요.


화장실 안에서조차
나는 늘 눈치를 봐야 했고,
시간을 계산해야 했고,
기억 속의 “미안함”은 자꾸만 쌓여만 갔어요.


그날 화장실 안에서 나는
내가 사람들에게 방해되는 존재처럼 느껴졌어요.


■ 이런 화장실이 필요해요


장루를 사용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건
그리 거창하지 않아요.


넓은 공간


가까운 위치의 세면대


파우치를 놓을 평평한 선반


외부 시선을 막아주는 배려


위급 상황을 위한 비상벨


이 정도만 있어도,
우리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하루를 살 수 있어요.

울산대학교병원 다목적(장루) 화장실. 울산대병원 제공

< 다목적 화장실 >


이건 장애를 가진 사람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에요.
아이를 데리고 나온 부모님,
몸이 불편한 어르신,
누구든 언젠가 필요할 수 있는 모두를 위한 공간이에요.


■ “괜찮으세요?”가 먼저인 세상에서 살고 싶어요


그날 나는 “죄송합니다”를 말했지만,
속으로는 계속 이런 생각을 했어요.


“왜 오래 걸려요?”가 아니라
“괜찮으세요?”라고 물어주는 세상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다급하게 수습하던 그 순간,
문 너머에서 들려온 말이
‘괜찮으세요?’였다면,


그날의 기억은
이렇게 오래 남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하루를 바꿀 수 있어요.
작은 말 한마디, 작은 배려로요.


■ 마무리 – 나답게 걸어낸 하루


오늘도 나는
화장실에서 숨을 죽였고,
누군가의 시선을 두려워했고,
또 한 번 ‘죄송합니다’를 말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답게 하루를 걸어냈습니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조금 다른 몸을 가진 사람의 걸음을
조금 더 느리게, 따뜻하게 이해해줄 수 있다면
그걸로도 나는 충분히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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