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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Nov 29. 2020

아무도 울지 않는 장례식

지난주 토요일 하루 종일 집에 있다 해가 다 지고 어두워진 후에야 마트를 가겠다고 나왔다. 늘 가던 마트는 차로 5분 거리니까 바람도 쐴 겸 조금 더 먼 거리에 있는 마트를 가기로 했다. 마트를 가려고 캄캄한 도로를 달리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할머니 돌아가셨어."

엄마는 우물우물 무엇인가 먹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래서 처음에는 확실히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했다. 재차 물었을 때에야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엄마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 때문에 처음에는 할머니의 죽음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가 이내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갑자기?라는 내 말에 엄마는 오늘, 내일 했어.라고 했다. 그 얘기도 꽤 오랫동안 들었던 것 같은데. 




할머니를 마지막으로 본 지가 언제인지도 모르겠다. 결혼 전에 할머니를 뵙고 그 이후에는 한 번도 뵙지 못했다. 그러니 짧게 잡아도 8년이다. TV에서 할머니 얘기만 해도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을 보거나, 할머니와 추억이 많은 사람들을 볼 때면 궁금해지곤 했다. 그 감정은 상상만 할 뿐 정확히는 내가 모르는 감정이다. 내 기억 속에 초등학생 때 까지는 명절 때마다 큰집에 가서 동그랑땡도 만들고 만두도 빚고 했던 것 같다. 그 집에 바글바글 모든 친척들이 모여서 큰 방에는 남자들이, 작은 방에는 사촌들이, 거실에서는 여자들이 끊임없이 음식을 만들곤 했다. 하지만 어린 그 기억 속에도 그 집에서 누군가 따뜻한 말이나 재밌는 말을 하고,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기억은 없다. 그저 각자 자기가 있어야 할 방에 들어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나던 기름 냄새와 온기 덕에 명절에 큰집 가는 일을 싫어하진 않았던 것 같다. 


그마저도 어느 제삿날 한 집에 모였다가 큰 싸움이 난 이후로 우리는 명절에 큰집에 가지 않게 됐다. 어른들 싸움에 자식들도 자연스럽게 왕래가 끊어졌다. 아버지만 할머니가 계시니 명절에 차례를 지내러 갔다. 몇 년이나 지속된 감정싸움에 그 이후로는 명절 때 좋은 기억이라고는 없다. 늘 누군가가 울었고, 고성이 오가거나 누군가는 인상을 쓰고 있었다. 그 싸움의 원인이 무엇인지 어린 나는 어렴풋이 안다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고 그저 눈치만 볼 뿐이었다. 


할머니는 젊은 시절에는 사랑과 전쟁에 등장하는 시어머니 못지않은 기세를 뽐내며 온갖 위세를 며느리들에게 아낌없이 부렸고, 덕분에 큰엄마와 엄마는 할머니라면 고개부터 흔들었다. 할머니에 대한 일화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으며 자랐는데 그중에 좋은 건 하나도 없었다. 어린 기억에도 할머니가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안아주거나 손을 잡아주거나 맛있는 걸 입에 넣어 준 기억은 없다. 

그건 큰 집에 있는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였다. 큰아버지도, 고모도, 작은 삼촌도 마찬가지였다.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들, 자신의 고집을 절대 꺾지 않는 사람들. 내가 친가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란 그런 것들이었다. 

그렇게 기세 좋던 할머니도 90세가 넘어가시면서 힘이 없어졌다. 평생 할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큰엄마는 환갑이 넘어서야 할머니에게 큰 소리를 낼 수 있게 됐다. 귀가 들리지 않아 큰엄마가 하는 말이 뭔지 정확히는 몰라도 할머니는 큰엄마가 본인을 구박하고 면박 주는 것이라는 것은 정확히 알았고 언제나 아들이나 고모한테 그것을 일렀다. 

할머니의 자식들과 며느리들은 우리들이 듣는 앞에서 빨리 돌아가셔야 되는데, 왜 이렇게 오래 살아서 여러 사람 힘들게 해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할머니만 돌아가시면 이젠 형제끼린 아예 볼 일 없다, 완전히 왕래 끊고 살 거야.라는 말도. 


할머니는 마지막까지 요양원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버티셨고 본인의 뜻대로 내내 큰집에서 지내시다 할머니의 작은 방에서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연세는 94세였다. 




엄마는 할머니의 부고를 전해주면서도 아버지와 큰아버지가 또 싸우고 있고, 고모가 이제 진짜 마지막이라며 말렸다는 말도 함께 전했다. 


빈소에 도착해서 본 사람들은 모두 10년 이상 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30대가 되고 나서는 한 번도 못 본 사람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지만 마스크로도 가리지 못하는 개운함이 느껴졌다. 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심각한 얼굴을 한 이도 없었다. 오히려 그 어느 때 보다 인상 쓰지 않는 말간 얼굴이었다. 

나 또한 애석하게도 아무 느낌이 없었다. 죄송하게도 눈물도 전혀 나지 않았다. 조문을 마치자마자 큰아버지는 빈소 앞에서 10년 만에 만난 나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 야 너 살이 왜 이렇게 쪘냐? 아니 살이 왜 이렇게 쪘어?

놀랍지는 않았다. 옆에 남편이 서 있었기에 부끄럽긴 했다. 살이 쪄서가 아니라 이런 사람들이 여기 가득하다는 것이. 

큰아버지는 신발까지 신고 나를 따라 나와 살이 쪘다고 몇 번이나 말해줬다. 

코로나 탓인지, 원래도 올 사람은 없는 것인지 조문객은 거의 없었다. 장례식장을 채우고 있는 것은 모두 우리 가족들 뿐이었다. 식사도 끝나서 더 이상 할 것도 없는 가족들은 저마다 한 상씩 채우고 앉아 휑한 공간을 채워보려고 노력했다. 


나의 할머니지만 난 할머니가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른다. 9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살아온 할머니의 역사가 단순할 순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자식들이 시원하고 개운한 얼굴로 장례식장에 서 있는 풍경은 마음 한 구석이 서늘했다. 얼굴도 모르는 연예인의 죽음 앞에서도 몇 날 며칠 마음이 무겁고 눈물이 났는데 어째서 가족의 죽음 앞에서 이렇게 아무런 마음의 동요도 일어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 치지만 할머니의 자식들은 어째서 저런 얼굴들일까?




오랜만에 만났다 해도 안부를 묻거나 이야기를 이어나갈 수 없었다. 그저 데면데면하고 어색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아무리 기억을 뒤지고 헤집어봐도 추억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것이 없었다. 

성장하면서 나는 꾸준히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선을 그으며 나의 우물 같은 공간에서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봤다. 그것으로 어떻게 그들과 구분 지어진다고 생각했는지, 나는 그러면서 나에게는 '교양'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떤 우월감도 느꼈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만난 그들은 놀랍도록 나와 닮아 있었다. 나는 마스크로 가려진 그들의 얼굴을 자꾸 둘러봤다. 나와 너무 닮은 사람들. 숨길 수 없이 피붙이라는 것이 드러나는 체형과 얼굴 생김새. 어쩌면 말투나 성격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사실보다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내가 너무 닮았다는 것이 절망적이었다. 


발인을 마치고 돌아온 다음 날 엄마한테 아버지 핸드폰 번호가 바뀌었다고 연락이 왔다. 아버지는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인연을 끊으려는 모양이다. 아버지도 나처럼 그곳에 있는 사람들과 자신이 닮았다는 사실이 싫었을까? 과연 핸드폰 번호를 바꾸는 것으로 그 모든 것을 끊어낼 수 있을까?

부모의 죽음 이후 자식들이 화해하고 우애가 깊어지는 드라마는 역시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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