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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Nov 08. 2020

이젠 빚을 갚을 수 없는 그녀에게

아침, 저녁 공기만이 아니라 한낮에도 오랫동안 창문을 열어놓을 수 없는 날씨가 되었다. 창 밖의 햇빛은 따뜻해 보이고 하늘은 파랗고 구름은 포근하고 말랑해 보이는데, 정작 창문을 열면 바람은 매섭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만, 결국 문을 닫아버리게끔 차갑다. 


겨울의 문턱에서 커튼을 바꿨다. 리넨 커튼이 이제는 많이 추워 보였다. 짙은 색 바탕에 귀여운 무늬가 반복된 커튼은 적당히 빛도 가려주고 추위도 막아준다. 아침이 돼도 예전만큼 쨍하니 밝아지지 않아 아직은 컴컴한 방에 누워 나는 요즘 생각을 많이 했다. 순서도, 맥락도 없이 뒤죽박죽이었다. 계절이 바뀌면서 새로운 소식들이 많이 들려왔다. 

어떤 소식은 기쁜 소식이었고, 어떤 소식은 슬픈 소식이었으나 모두 정확히 이야기하면 나와 상관없는 그들의 일이었다. 기쁜 소식에는 축하한다는 말을 전했고 그대로 내 마음을 떠났으나, 슬픈 소식은 나를 떠나지 못하고 내내 주변을 맴돌았다. 어쩌면 내가 들었던 슬픈 소식들은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사람, 이야기를 나눠 본 적도 없는 사람, 같은 공간에 있어 본 적도 없는 사람들. 



인테리어를 위해서가 아니라 오로지 빛을 막기 위해 창문을 막아 본 적이 있었다. 이십 대 초반, 자취하던 시절이었다. 그때 나는 작은 방 하나와 화장실이 딸린, 복도에 같은 방이 6개쯤 있는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작은 방에는 창문이 하나 있었다. 처음 그 집을 선택했을 때는 그 창문을 통해 햇빛이 넉넉하게 쏟아져 들어온다는 점에 반해 단박에 계약을 했다. 보증금 10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이었고 그 다세대 주택의 이름은 '행복한 집'이었다. 한낮의 방은 아무것도 없어도 따뜻해 보였다. 그런데 나는 몇 개월 후 그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을 참을 수 없어서 신문지를 구해서 창문을 막아버렸다. 위에서 아래까지 신문지를 몇 겹을 붙이고 나니 한낮에도 집은 어둑어둑했다. 

도저히 햇빛을 참을 수 없었던 건 잠을 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몇 달 동안 불면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몸은 푹 쓰러져 녹아버릴 것처럼 피곤한데도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이불을 뒤집어쓰고 눈을 꼭 감고 있어도 소용이 없었다. 아침에, 낮에 나도 모르게 스르륵 빠져드는 쪽잠으로 버티려니 한낮의 햇빛이 싫고 불편했다. 

나는 그런 상태인데도 밖에 나가서 평소와 다르다는 말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무슨 일 있어?"라거나, "어디 아파?"같은, 이 사람이 뭔가 달라 보인다는 걱정 섞인 말 같은 것들 말이다. 학교에서 나는 아무 일도 없는 사람인 것처럼 연기를 했다. 수업을 빠지지 않았고, 학관에 가서 친구들과 밥을 먹었고,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고 웃었다. 그리고 나의 작은 방, 이제는 낮에도, 저녁에도 어두운 나의 방에 돌아오면 멍하니 잠이 오기만 기다렸다. 

그게 어떻게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무슨 일 있어?"

라는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대답을 할까? 고민해 본 적이 있다. 어디서부터 얘길 할까? 어디까지 얘길 할까? 처음에는 그런 것을 고민하다 이내 도저히 정리되지 않는 '무슨 일'을 과연 상대방이 이해해줄까? 지루해하지 않을까? 에 생각이 미쳐 그만 아무 일도 없다고 해야겠다.라는 것으로 결론을 내곤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지금도 그래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데?라고 묻는다면 잘 설명할 자신이 없다. 

어떤 일 때문이 아니라 이 일이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영원히 반복될 거라는 것이 문제였다. 결코 이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에 빠져들고 나니 사는 게 가장 두려웠다. 그때 나는 오히려 죽음이 따뜻하게 느껴졌다. 끝이라는 것은 휴식의 다른 이름 같았다. 


다행히(?) 나는 학교 상담실에서 매주 상담을 받고 있었고 상담 선생님은 나에게 병원 이름과 전화번호 하나를 적어주었다. 그리고 나는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갔다. 30분 정도 나는 뒤죽박죽, 횡설수설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고 의사는 수면제와 프로작을 처방해줬다. 처방받은 약을 가지고 집에 와서 이건 꽤 영화 같다고 생각했다. 수면제와 우울증 약은 할리우드 영화에 자주 등장하고 그런 약을 신경질적으로 털어 넣는 이들은 대개 헝클어진 나이트가운을 입은 채로 집안을 활보하고 알코올 중독을 앓고 있거나 했던 것 같다. 어쨌든 그들은 배우였다.

하지만 나는 그저 다세대 주택에 월세를 살고 있는 대학생 중에 하나였다. 나이트가운 같은 것은 없었고 집에는 침대도 없었다. 신문지를 떼어내지 않은 방에서 수면제를 먹고 나는 밀린 잠을 잤다. 수업에 들어가기 전에는 프로작을 먹었다. 


그래서 수면제와 프로작이 나를 신문지로 햇빛을 막은 캄캄한 방에서 구원해줬을까? 그들은 내 손을 잡아줬다. 하지만 나를 집 밖으로 나와 햇빛을 쐬게 만든 것은 잠을 자고 일어나니 몰려오는 억울함이었다. 

나는 무엇인가 불쑥불쑥 올라오는 억울함 때문에 이대로 이 작고 어두운 방 한 구석에서 이렇게 죽음만 생각하고 싶진 않았다. 여전히 이 집에 찾아오는 이도, 나의 상태를 걱정하는 이도 없었다. (걱정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어떤 상태인지 몰랐으니까.) 그러니 나 스스로 일어나 저 문을 걸어 나가지 않는다면, 저 신문지를 걷어내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도 모르게 이 낡고 볼품없는 자취방에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창문에 붙은 신문지를 박박 찢은 것이 아니라 그런 생각을 몇 날 며칠을 하면서 노트북으로 무한도전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때 무한도전은 최고 인기 예능이었다. 그리고 나는 봤던 것을 보고 또 보면서 그들이 하릴없이 넘어지고 물속에 빠지고 논두렁을 달리는 것을 보면서 배를 잡고 웃었다. 그렇게 매일매일 웃기만 했는데 정신이 예전보다는 맑아지고 몸에 힘도 들어갔다. 그리고 별 일 아니었다는 듯이 신문지를 뜯어냈다. 



그러니까 나를 그 어두운 방에서 구원해준 건 예능이었다. 웃음을 주는 사람들. 다른 사람들을 웃기는 것이 직업인 사람들. 그들은 적막하기 그지없는 나의 방에서도 한바탕 즐겁게 놀다 가줬다. 그들을 보면서 나는 성실하게 웃었다. 


그러니 나는 일면식도 없는 그녀의 슬픈 소식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그녀가 던지는 말에 나는 많이 웃었고 행복해했다. 같은 해에 태어났고 좋아하는 노래와 가수, 문학이 자주 겹쳐 화면으로 많이 맞닥뜨릴 수밖에 없었던 그녀. 나는 그녀가 정말 좋았다. 나에게 그토록 무해한 웃음을 많이 안겨준 그녀가 그렇게 허망하게 가버렸다는 소식에 나는 멍해졌다. 빚진 마음이었다. 나는 그녀 덕분에 많이 웃을 수 있었는데, 나는 힘들고 우울할 때 그들이 던져주는 웃음 때문에 일어설 수 있었는데.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를 최대한 오랫동안 기억하는 일일 것이다. 그녀를 단박에 잊어버리지 않고 가끔이라도 그녀를 떠올리는 것, 그녀가 했던 말에 웃었던 순간, 그녀와 내가 같은 가수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던 순간 같은 것을 오래 기억하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는 것이 마음 아프지만 그렇게라도 오랫동안 그녀를 잊어버리지 않는 것으로 빚을 갚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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