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시즌2 : 베르사체
썸네일부터 화려함의 극치다. 그래서 그냥 지나쳤다. 넷플릭스 추천 목록에 오래도록 떠 있었지만 지나쳤던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 : OJ 심슨]을 보기 시작했고, 완전히 이 드라마에 빠져버렸다. 그리고 베르사체 전기 영화(?)라고 생각했던 그 썸네일은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의 두 번째 시즌이라는 것을 알게 됐고 주저 없이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이 드라마를 본 사람이라면 제목만 [베르사체] 일뿐 실제 주인공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라도 제목을 베르사체라고 지었을 것이다. 제목이 '앤드루 커내넌'이라면 누가 클릭을 하겠는가?) 이 드라마의 실제 주인공은 '지아니 베르사체'를 죽인 범인 '앤드루 커내넌'이다.
1997년 그가 자신의 저택 앞에서 총격을 당했을 때, 나는 한참 어린 나이였고, 아마 그의 죽음은 전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을 테니 나도 어느 신문 구석에서 그의 죽음을 기사로 접했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실제로 이 드라마를 끝까지 다 본다고 해도 범인이 왜 이 디자이너를 일말의 여지도 없이 죽였는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우리는 그의 감정을 알 수 없고 추측할 뿐이다.
앤드루 커내넌은 필리핀계 아버지와 이탈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이다. 그의 아버지는 소위 아메리칸드림을 이루기 위해 온 사람이었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인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자식들 중 유난히 머리가 영특했던 앤드루를 자신의 정신을 이어받을 계승자로 점찍는다. 아버지는 그를 왕자님처럼 대했고, 최고의 학교에 들어가 최고가 되는 것만이 살아남는 길임을 세뇌시킨다. 하지만 현실은 당연히 화려한 언변으로만 해결되지 않았고, 그의 아버지는 증권 중개인으로 불법을 저질러 자신의 고향인 마닐라로 가족들을 버리고 피신해버린다.
돈도, 집도 없어진 상황에 앤드루는 자신의 현실을 믿을 수 없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거짓말을 하기 시작한다. 특별해지기 위해, 사랑받기 위해, 거절당하지 않기 위해 그는 자신이 만들어놓은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 그의 아버지는 필리핀에서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큰 파인애플 농장을 운영하고 있고,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비싼 만찬을 차려주고 사랑을 아낌없이 베푸는 사람이다. 그는 명문대학을 졸업한 학생이었다가, 유명 영화의 세트장을 디자인한 디자이너였다가, 합병을 주도하는 기업인이 되기도 한다. 누군가는 그가 쏟아내는 화려한 말들에 속아 그를 믿기도 하지만 그때뿐이다. 그의 옆에 남아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사랑받기 위해 돈을 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점점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해 약국에서 일을 하고, 마트에서 계산을 하기도 하지만 유니폼을 입고 푼돈을 시급으로 받는 자신의 처지는 한 번도 상상해보지 않는 모습이었다. 결국 그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삶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뛰쳐나온다.
그는 동성애자였고, 나이 많은 부호들을 상대로 하는 성접대로 돈을 벌기 시작한다. 비싼 차를 타고, 최고급 양복을 입고, 신용카드를 마음대로 긁으면서 산다. 자신에게 원조를 하던 부호가 앤드루에게 어느 날 충고한다. 자신이 이런 부를 얻을 수 있었던 건 매일매일 성실하게 일했기 때문이라고, 너도 다시 공부를 시작하라고. 앤드루는 대답한다.
"그건 특별하지 않잖아요."
평범한 것이 죽도록 싫었던 그는 베르사체처럼 되길 원한다. 그는 부와 권력을 모두 가졌다. 동양인이며 성소수자인 자신은 눈에도 띄지 않고 관심의 대상이 되기도 힘들지만, 베르사체는 당당히 커밍아웃을 할 수 있다. 그가 소유한 세계는 화려함의 극치다. 베르사체와 앤드루는 클럽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고 그 만남으로 앤드루는 베르사체에 대한 선망과 집착이 더 커져버린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이고 싶다는 그의 열망에 더 불을 지폈을 것이다.
거짓말을 하다 보면 알게 된다. 거짓말이 주는 순간의 안온함이 너무 달콤하다는 것을. 그리고 혼자 남겨졌을 때 파도처럼 덮치는 불안과 두려움이 말도 못 하게 크다는 것을. 하지만 인간은 버림받고 싶지 않기에 기꺼이 밤에 찾아오는 두려움을 애써 지워버린다. 그렇게 하루, 한 달, 1년의 시간을 쌓아 가다 보면 누구나 앤드루의 삶처럼 무엇이 진짜 자신의 인생인지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앤드루에게 정말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오로지 앤드루가 지금 이 순간 진실만 이야기해주길 원했다. 그것이 진정 그와 이어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임을 앤드루도 직감했을 것이다. 하지만 데이비드가 물었던 단순하고도 간단한 질문에도 앤드루는 진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가 평생 동안 기다려왔다고 이야기했던 사람과도 멀어졌다. 그 이후부터는 예상 가능한 파멸의 시간이 시작된다.
아메리칸 크라임 스토리의 특징은 놀라울 정도로 실제 인물과의 싱크로율이 높다는 점이다. OJ 심슨에서도 실제 인물들의 외형과 매우 흡사해서 놀라울 지경이었는데 베르사체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아니 베르사체부터 앤드루 커내넌까지 실존 인물들과 매우 흡사하다. 앤드루를 연기한 대런 크리스의 연기는 놀라울 뿐이다. 그가 접대했던 부호 중에 한 명은 앤드루에게 '당신은 이 관계가 실제라고 믿게 해 준다고, 우리가 진짜라고 느끼게 해 준다'라고 이야기하는데 이 드라마 내내 그렇다. 대런 크리스의 연기가 드라마 [베르사체]의 연결고리가 되고, 서사가 되어 처음부터 끝까지 질주하게 만든다.
범죄자에 대한 스토리를 구구절절 풀어내는 이야기에 혐오를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드라마는 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거의 앤드루 커내넌의 전기영화 같은 느낌이다. 불편한 부분을 감수하고 본다면 이 이야기는 굉장히 흥미롭다. 그렇게 특별한 사람이 되고자 했던 앤드루가 결국에는 어떻게 되었는지, 이 드라마의 마지막은 이보다 더 잘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세련되게 표현했다. (문학적이라고까지 느껴진다.) 그러니 이 드라마를 시작했다면 마지막 장면까지 꼭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