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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Sep 22. 2021

추석선물세트를 받기 위해


9월 13일 월요일 첫 출근을 했다. N 번째 첫 출근이다. 5시 반에 일어났다. 우리 집에서 회사까지 가기 위해서는 넉넉잡고 2시간이 필요하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아파트에서 지하철역까지 걸었다. 아직까지는 춥다는 생각보다는 상쾌했다. 마음의 각오를 단단히 했는데 코로나의 영향 때문인지 지옥철은 아니었다. 재택근무나 직장을 잃은 사람이 많은 탓일까?


회사에 도착해서 오전 시간은 전달받은 가이드를 내내 읽었고 점심은 구내식당에 내려가 혼자 먹었다. 3개월 단기 근무에 자기소개나 팀원 소개란 의미 없고 필요 없다. 그저 점심시간이 되면 알아서 점심을 먹고 시간 내에 돌아오면 된다. 구내식당이 있어서 다행이다. 심지어 맛있다!


오후가 되어 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잘못 들어왔구나 싶었다. HTML이 웬 말이고, 한자가 웬 말인가? 흰 것은 화면, 검은 것은 글씨인 것 밖에 모르겠다. 어쩌지? 전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당황스러웠다.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은데 자리로 돌아와서 실습을 해봐야 하는데 멍했다. 가이드를 뒤져가며 더듬더듬 실습을 해봤는데 역시 틀린 부분이 많았다. 안 되겠다. 이건 내가 할 수 있는 분야가 아니야. 집에 가기 전에 죄송하지만 업무를 해보니까 수행할 수 없는 부분인 것 같다고 말씀드리자 다짐했다.


착잡한 심정이 되어 화장실을 다녀오는데 사무실 뒤쪽에 쭉 세워 둔 추석 선물세트가 눈에 띄었다. 저 선물세트는 우리를 위한 걸까? 몇몇 사람들 책상 밑에 이 빨간색 가방이 놓여 있던데? 나도 이걸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추석선물세트를 받고 싶었다. 아니, 선물세트 그 자체보다 명절이 오기 전에 그런 소속감을 느끼고 싶었다. 지하철을 타면 사람들이 김 세트나, 참치, 스팸세트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차피 찬장에 쌓아두고 언제 없어질지 모르는 것들이지만 묘하게 그런 것을 받을 수 있는 그 사람들이 부러웠다. 결국 첫날 나는 내일부터 나오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아침에 지하철역을 빠져나오면 내가 다녔던 옛 회사 빌딩이 보인다. 그리고 그 앞에 새로 지어진 어마어마한 빌딩 숲이 또 있다. 사람들은 좁은 역 출구를 빠져나와 부지런히 자신의 회사를 향해 걷는다. 나도 사람들과 같은 방향으로 걷는다. 그 기분이 나쁘지 않다. 사무실에 들어가기 전에 빌딩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도 한 잔 산다. 일을 하는 내 모습, 사회의 일원이 된 내 모습이 처음도 아닌데 괜히 뿌듯하다.

하루하루 더해갈수록 종이와 글씨로밖에 구분 안되던 것들도 점점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아침이면 출근해서 내 자리에 앉아 할 일을 하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고 소화시키기 위해 나의 옛 회사 앞까지 산책을 가보기도 했다. 누군가를 만날까 봐 걱정을 하면서도 괜히 그 주변을 뱅뱅 돌았다.

금요일이 되어서야 이 회사의 시험에 통과한 것인지 뒤에 세워져만 있던 추석 선물 세트를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계약서를 썼다. 계약서를 쓰면서 내가 알고 있던 급여는 세금을 떼기 전 금액이었다는 것, 계약 기간은 내가 알고 있던 것보다 더 짧다는 것을 알게 됐다.


예전에 다녔던 회사를 올려다보면서 저 회사를 그만두지 않았다면 지금쯤 다른 동기들처럼 과장쯤 됐겠지? 그렇다면 이렇게 최저 임금을 받으면서 새로 일을 배우진 않아도 됐을 텐데? 출퇴근 왕복 4시간을 견디지 못해서 그만둬놓고 다시 이 자리에 서다니? 심지어 더 못한 처우를 받고? 나는 왜 이런 선택들을 하면서 살아서 이 모양이 된 거지?

첫날 집에 와서 나는 내가 한 선택들에 대해 쉴 새 없이 자책했다. 남편은 덩달아 우울해졌다. 내가 한 선택에 남편도 있다는 것, 이 결혼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다음 날부터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지난 시간에 내가 했던 결정에 대해 자부심이 있던 때도 있었다. 퇴사를 함으로써 나는 새로운 도전도 했고, 회사를 다닐 때는 해본 적 없는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그 기간 내내 후회와 좌절만 하고 산 것은 아니었다.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조금 힘들어졌다고, 지난 내 모든 시간을 부정하는 것은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가?

지금 쓰는 이 계약서가 곧 나인 것은 아니니까, 나는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약된 기간 동안 이곳에서 맡은 일을 하는 것이다. 할 수 있을 일을 성실하게 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은 없다. 바꿀 수 없는 과거, 내 힘으로 되지 않는 상황은 오래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추석 연휴로 달콤한 휴일을 보냈다. 이제 다시 내일이면 출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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