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스페이스K 서울 미술관에서 헤르난 바스라는 회화 작가를 알게됐다. 그는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주한 쿠바계 부모님 밑에서 자라왔다. 2005년 LA현대미술관을 시작으로 브루클린 미술관, 베니스비엔날레 전시를 열며 20대라는 젊은 나이에 세계적 스타로 등극했다. 휘트니 미술관과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등 주요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기도 한 작가인만큼 한국에서의 첫 전시는 관객들에게도 큰 의미로 다가왔을 듯 하다. 비록 답답한 마스크를 써야했지만,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가 오르지 않았기에 헤르난 바스의 2007년 초기작부터 코로나 19가 전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 2020년 신작까지 직접 봐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전시회 제목인 ‘모험, 나의 선택’을 보고 작가의 모험정신을 표현하는 동시에 관객들을 자신의 모험에 초대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거의 모든 캔버스 안에는 앳되보이는 미소년이 등장한다. 어른과 아이의 희미한 경계에 놓인 이들은 각기 다양한 상황에 처해있다. 명화와 고전문학, 영화 및 음악 등 다양한 매체에서 영감을 받은 작가의 작품은 특유의 장식적이면서도 낭만주의적 상상력으로 내면의 불안과 두려움을 극적으로 담아냈다고 한다.
'생각의 흐름'은 작가의 초창기 작품이다. 추상기법으로 표현한 배경은 혼란한 세상을, 방대한 화면 속 개미만한 집과 사람의 모습은 존재감은 크기로 시각화한 것 같았다. 이렇게 조그마한 작가의 초기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시간이 갈수록 커져간다. 또한 혼자였던 소년은 이제 친구들과 함께 그려지기도 한다.
‘소년과 바다’는 제목과 보트에 써진 이름을 보면 알듯이 인간은 파괴될 순 있어도 패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준 ‘노인과 바다’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반가움이 들었다. ‘노인과 바다’ 배경이 쿠바란 점과 작가가 쿠바계 화가란 것도 연관이 있는 듯 하다. 그림 속 주인공은 노인에게 친절했던 소년으로 과거 노인의 청새치를 먹어치운 상어에게 복수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폭풍우가 몰아치고 소년의 얼굴엔 불안감이 감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는 누구나 무력하고 미약한 존재란 걸 말해주는 것 같다. 오늘을 힘겹게 살 파도가 끊이지 않는 또 다시 내일을 겪어야하는 현대인들의 불안함이 보였다. 전시를 보는 내내 색감이 좋아 힐링되었고, 최근 바다에 가본 적은 없지만 내가 저 폭풍우 속에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인물들의 표정도 실감나서 어떤 감정인지 느낄 수 있었다.
‘분홍색 플라스틱 미끼’는 화면의 크기로 관객을 압도해버렸다. 주최측에선 이 그림을 가져오려고 이송비와 보험비가 엄청 만만치 않게 들었지만 그만큼 관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는데, 정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시대의 반항아인 제임스 딘이 손수건을 던지는 것을 그려서 지나가버린 미국의 시대에 안녕을 고했다는 표현은 획기적이었다. 수많은 이주민들이 미국으로 향하는 배를 타면서 꿨을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허상이 부숴진 것을 플라스틱 플라밍고 떼에 속아 발목이 걸린 진짜 플라밍고, 폐가가 되어버린 주택들, 낡아버린 자동차로 풍자했다. 이 그림을 보면서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속 겉만 화려한 매직캐슬과 지어지다 만 폐가들,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인 아이들의 모습들이 연상되었다. 과도한 개발로 인해 환경파괴와 사각지대에 놓인 이들이 계속 생겨선 안된다는 경각심을 준다.
플라밍고는 다양한 디자인 상품으로 나올만큼 인기가 많고 아름다운생물이다. 헤르난바스의 작품엔 수많은 플라밍고가 등장한다. 플로리다에서 많이 서식하는데다가 플라밍고 수컷들이 짝을 짓고 버려진 새끼 플라밍고를 함께 돌본다는 특성이 작가가 성소수자란 것과 연관이 있단 걸 해설을 들으면서 알게 되었다.
지독한 가뭄 후의 시작은 딱 봤을 때 세기 말 감성의 넷플릭스 드라마같은 기분이 들었다. 인간들의 문명이 바이러스와 환경오염 등으로 붕괴한 이후 도시에서는 더이상 수도관이 작동하지 않고,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마트를 털고, 힘 없는 소년은 생존을 위해 물을 받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의 모습이 될 지도 모른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 작품은 코로나가 한창 시작할 2020년에 제작되었는데, 네스호의 전설의 괴물 네시를 찾는 괴물 사냥꾼의 모습에선 팬데믹 시대 속 자기만의 세상에 갇혀있는 사람들의 사람들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아무도 방해하지 않기에 편안하지만 웬지 모를 쓸쓸함이 인물의 얼굴에서 묻어난다. 사람들은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것에 끌리기 때문에 괴물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네스호의 전설을 보려고 수많은 관광객들이 갔었다. 환상이지만 괴물에 집착하는 인물의 모습이 인상깊어서 단편소설과 아이패드 드로잉으로 패러디를 해봤다.
새는 히치콕 감독의 영화 새를 모티브로 제작된 작품이다. 영화에선 갑자기 갈매기 떼가 나타나 아이들을 공격하고, 굴뚝으로 급습한 참새떼들이 온 마을을 휘저어놓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새떼를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달리 그림 속 소년은 아름다운 저녁놀을 등지며 목에 건 팝콘 목걸이를 노리고 진격하는 새들을 전혀 신경쓰지 않고 여유롭게 만지작거리고 있다. 두려움에서 완전히 벗어난 모습이랄까. 나도 헤르난바스처럼 다양한 매체에서 영감을 받아 아름다운 색감을 지닌 좋은 작품들을 만들어가고 싶다. 막연히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끊임없이 모험을 시도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