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건희컬렉션 특별전: 한국미술 명작’ 전시회가 열렸다.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한국 근대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 있다는 점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예매를 알아보는데 아쉽게도 코로나 방역 때문에 시간에 따른 입장 가능한 인원이 정해져 있었다. 예약하려고 하면 자리가 금방 차버렸다. 그래서 며칠에 거쳐서 여러 번 예약을 도전한 끝에 전시회 티켓을 얻어 갈 수 있었다. 한 시간이라는 제한 시간이 있지만 그만큼 더 알차고 집중력 있게 관람하기로 했다.
처음으로 본 것이자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백남순의 <낙원>이었다. 작품 속 세계는 서양에서의 이상향의 대명사 아르카디아와 동양의 무릉도원의 결합한 풍경이었다. 아름다운 봉우리와 풍요로운 섬들, 아담한 가옥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아무런 근심 없이 일상을 보내고 있다. 나도 이렇게 평화로운 그림을 보면서 안정감이 느껴졌다. 동시에 현실도 낙원이 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람도 느꼈다. 하지만 작품에 관한 이야기는 낙원과는 거리가 먼 하나의 소설 같았다. <낙원>은 원래 친구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선물로 보내졌는데, 이후 한국전쟁이 터져 다른 작품들이 전부 소실되었다. 그렇게 백남순의 해방 이전의 유일한 현존 작이 되었다.
변관식의 <모창춘색>은 정겨움이 느껴지는 한국 산천을 주제로 그린 작품이다. 파노라마 사진처럼 느껴지는 그림 속에는 기와집과 초가집, 돌로 지어진 성벽, 새순이 돋아가는 나무들과 복사꽃 등 다양한 소재들이 나온다. 사실감 있는 묘사 덕에 산수화 필터로 찍은 사진 같다는 느낌도 받았다. 가운데에 있는 다리에는 지팡이를 쥔 채 마을로 가는 노인과 머리에 짐을 이고 걸어가는 여자는 고즈넉한 일상 속에서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박래현의 <여인>은 섬세한 표현력과 매력적인 색감 선택에 눈길이 끌렸다. 투명한 느낌을 주는 채색은 작품 주인공의 성격과 분위기를 표현해줬다. 우아한 한복의 주름도 한몫한다. 수심에 잠긴 듯 턱을 괴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여인의 손에는 한 마리의 종이학이 쥐어져 있다. 이것의 의미는 알려지진 않았다. 내 생각으로는 고민하는 과정에서 집중력을 높이려고 접었거나 학처럼 훌훌 털고 날아가고 싶거나 이뤄지길 바라는 소원이 있는 것 같아 접은 것 같다.
김기창의 <군마도>는 역동감이 생생히 느껴진 작품이다. 수묵채색으로 거칠게 표현된 말들은 언제라도 날뛸 것 같은 인상을 줬다. 정해진 레일만 달리는 경주마가 아닌 길들지 않은 야생마가 어떤 것인지 보여줬다. 크기도 엄청난 탓에 관람하는 동안 압도당하는 기분을 느꼈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1955년 제작된 작품은 전쟁 이후 재개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되었다. 이를 통해 작가는 사납게 날뛰는 말처럼 다 무너져버린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나자는 메시지를 던지는 것 같다. 동시에 이리저리 날뛰는 말들처럼 정해진 레일이 아닌 자신의 방향을 찾으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김환기의 <산 울림 19-II-73#307>은 흰 직사각형과 푸른 점들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김환기는 1964년 뉴욕에 정착 후 점, 선, 면 만으로 이루어진 추상 화면에 대한 실험을 계속하던 중 그는 “선인가? 점인가? 선보다는 점이 개성적인 것 같다”, “날으는 점, 점들이 모여 형태를 상징하는 그런 것을 시도하다, 이런 걸 계속해 보자”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 무렵부터 점만으로 이루어진 올오버 구도의 점화 양식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다양한 구도들과 시도가 이뤄졌고 <산 울림 19-II-73#307>에서는 뉴욕시기 점화 양식의 완성 단계를 보여줬다. 흰 사각형 안에는 동심원들이 세 방향으로 퍼져나가면서 울림을 만들어내며 흰색의 사각형 밖에서 대각선의 방향으로 별처럼 쏟아지는 점들과 대조를 이룬다. 채색 없이 캔버스 바탕으로 그대로 남겨둔 흰색의 사각형은 내부와 외부의 공간이 중첩되면서 우주와 같은 무한의 공간으로 깊이 확장되는 효과를 냈다. 흰 선에는 점이 찍히면서 번진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그 자체로도 미묘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이를 통해 작가는 당시 미국의 색면 추상과는 차별화된 추상화의 세계를 구현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평소 접하기 힘든 다양하면서도 수준급 미술품들을 직접 눈앞에서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전시를 통해 공개된 작품 이외에도 몇 만 점이 있다는데 이 모든 것을 개인이 수집해 기증했다는 점도 놀라웠다. 앞으로 더 많은 근대 작품들을 접하면서 당시 시대의 풍경과 생각을 접하고 영감을 받을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