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스

by 김나윤

누런 박스는 홀로 도시의 온갖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문 앞에 서 있었다. 박스는 잡동사니 따위를 잔뜩 머금은 상태라 당장이라도 속이 터질 것 같았다. 그 기분을 문은 모르는지 굳게 닫혀있었다. 뱃속에 들어 있는 것이 나가려고 꿈틀거리는 동안에도 박스는 고통을 참은 채 가만히 인내할 뿐이었다. 사람들은 자신이 아닌 내용물을 원한다는 것을 알까? 아무것도 모르는 박스는 창문에 서리가 껴들어도 찬 바닥 위에서 꿋꿋이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창밖으로 희미한 빛이 밝아올 때쯤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박스는 드디어 집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 눈을 반짝였다.


아쉽게도 열린 것은 옆문이었다. 여기 집주인은 잠꾸러기라고 생각한 박스는 씁쓸해했다. 해가 중천일 때쯤 삐걱 소리와 함께 앙상한 팔이 나와 박스를 들어 올렸다. 박스는 이제야 따뜻한 곳으로 들어왔다는 점에 안심했다. 그때 앙상한 손이 식칼을 가져오더니 박스의 배를 찔렀다. 드드득 소라와 함께 복부가 열리고 잡동사니들이 쏟아져나왔다. 전자기기, 식료품, 책 등 다양했다. 순식간에 박스의 임무는 끝이 났다. 마무리로 근육 역할을 해주던 종이테이프를 뜯기고 온몸이 해체당해 납작하게 펴졌다. 박스는 고향 집 같았던 화물 단지가 떠올랐다. 나가기 싫은데 억지로 이끌려 택배 트럭에 타게 되었다. 멀미를 참고 먼 길을 왔지만 돌아온 것은 식칼밖에 없었다. 박스는 왜 이렇게 자신을 도구 취급을 하느냐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이미 지하 분리수거장에 던져진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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