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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삭제의 매혹
문명은 규칙으로 작동하지만, 규칙이 많아질수록 움직임은 둔해진다. 처음엔 방향을 알려주던 기준들이 어느 순간부터는 생각을 대신한다. 익숙하다는 이유로 유지되는 규칙은 질문을 잃고, 질문을 잃은 구조는 스스로를 점검하지 않는다.
새로운 것을 만든다는 말은 언제나 매혹적이지만, 실제로 더 어려운 일은 불필요해진 것을 내려놓는 일이다. 남아 있는 규칙 중 상당수는 지금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다른 속도를 전제로 만들어진 질서가 오늘의 판단을 끌어당긴다. 삭제는 현재에 맞게 숨을 다시 고르는 행위일 뿐이다.
유연한 구조란 기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기준이 상황을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 사람을 보호하지 못하는 규칙은 오래될수록 무거워지고, 그 무게는 결국 공동의 발걸음을 늦춘다. 문명이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은 언제나 무언가를 더 얹을 때가 아니라,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을 조용히 내려놓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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