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이주 전이었나, 정말 더는 버틸 수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기와 조금이라도 떨어져 있고 싶었다. 그래 운전. 운전을 하자. 신생아 시절 너무 힘들 땐 아기를 뒷좌석에 태워놓고 운전을 했었지. 운전을 하면 그래도 조금은 쉴 수 있잖아. 남편과의 말다툼 끝에 나는 한 시간 정도 자유시간을 확보하고 차를 몰고 나갔다. 원래는 아기 옷을 사러 가려고 했는데 막상 운전대를 잡으니 그건 핑계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일단 나오긴 했는데 갈 곳도 없고 가고 싶은 곳도 없어 괜히 서러워졌다. 차를 세운 곳은 집 앞 공원 주차장. 저녁이 되어 공원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시동을 끄고 의자를 뒤로 젖혔다. 쥐 죽은 듯 고요했고 나는 대기를 벗어난 우주비행사처럼 지구로부터 멀리멀리 도망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지만 겨우 20분 남짓 지나있었다. 음료수나 하나 사서 들어가야겠다. 근처 보바 가게로 차를 몰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기 동요가 아닌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틀겠어. 그렇게 프리웨이를 달리는데 문득 기분이 묘해졌다. 온전히 나만 있는 공간,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공간, 그리고 나는 어디든 갈 수 있다. 이런 자유로운 기분 얼마만인가? 밤 운전이란 괜히 그런 것이다. 괜히 센치해지고 괜히 기분이 이상해지는 것. 괜히 지난날을 떠오르게 하는 것.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예고 입시를 준비했었다. 그때 미술학원이 밤 10시에 끝났는데 종종 엄마가 나를 데리러 왔었다. 엄마는 횡단보도 맞은편에 서있었는데 다른 학생들의 눈에 안 띄게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친구들과 헤어지고 길을 건너가면 내 이름을 부르며 스윽 나와서 팔짱을 꼈다. 그리고 우리는 어두운 길을 오래도록 함께 걸었다. 내가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 엄마는 더 자주 나를 데리러 나왔다. 내가 다니는 예술 고등학교가 집에서 꽤 멀었기 때문에 지하철 통학을 해야 했는데 저녁 실기가 있는 날이면 학교에서 수업이 밤 10시에 마쳤다. 지하철을 한번 갈아타고 집 근처에 가면 거의 11시 즈음. 나는 내리기 몇 정거장 전에 엄마에게 문자를 했다. 엄마는 시간 맞춰서 역으로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다.
약속한 시간, 약속한 출구로 올라오면 엄마의 차는 비상 깜빡이를 켠 채 어김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덜컥-
“다녀왔습니다-”
탁-
엄마는 차에서 항상 이상한 라디오 방송을 틀어놓고 있었다. 목탁소리를 반주삼아 명언을 읊어주는 원불교 라디오라든지 올드한 7080 노래가 나오는 채널이라든지... 그게 깜깜하고 어두운 밤 분위기와 맞물려 묘한 느낌을 주었다. 그리고 엄만 볼륨을 꽤 크게 틀었었는데 그것도 이상한 느낌을 주는데 한몫했던 것 같다. 차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 갑자기 다른 세상에 들어온 느낌. 바깥의 소음은 차단되고 라디오 소리만 크게 들리던 그 차 안.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들어온 것처럼. 이제 생각해 보니 엄마의 세상에 내가 잠깐 접속했던 것 아니었을까. 엄마의 라이드는 고등학생 시절 3년간 변함없었고 대학에 가서도 내가 늦는 날이면 엄마는 어김없이 지하철 역으로 나를 데리러 와주었다.
그때 우리 집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15분에서 20분 남짓. 엄마는 나를 데리러 오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때 조금은 행복했을까? 운전대를 꽉 움켜쥐며 그때를 다시 한번 떠올려본다. 엄마도 나처럼 밤 운전을 하는 동안 아주 잠시 잠깐이라도 자유를 느꼈을까? 그래 아마 그랬을지도. 엄마는 항상 힘들었으니까. 사는 게 쉽지 않았을 테니까. 엄마가 짊어진 짐이 너무나 많았으니까. 라디오를 틀고 혼자만의 드라이브(비록 그게 딸을 데리러 가야 하는 일과였지만)를 즐길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을지도.
밤 운전이란 그런 것이니까. 괜히 지난날을 생각하게 하니까… 그럼 나를 데리러 나오면서 엄마도 옛날을 떠올렸으려나. 문득 누군가와의 추억이 담긴 노래가 운 좋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와 잠깐 흐뭇했다든가 내가 엄마를 떠올린 것처럼 엄마의 엄마를 생각했다든가 이어지지 않았던 안타까운 첫사랑을 떠올렸다든가… 그도 아니라면 부디 엄마를 옭아맨 모든 괴로움에서 잠깐 벗어난 기분이었기를. 하지만 이 모든 것은 나의 오랜 버릇, 지나친 의미부여에서 온 망상일지도.
어느새 음료가게 앞이다. 혀가 얼얼할 만큼 단 음료수를 주문해야겠다. 인생이 이토록 쓴 맛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