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과 오리탕, 그리고 광주의 5월
5월 광주에서 먹었던 한 끼 밥상의 추억
큰 이모 집 가는 길은 늘 해가 지면 출발했다. 엄마는 공장 식구와 가족의 저녁밥을 다 지어 먹이고 나서야 비로소 화장대 앞에 앉을 수 있었다. 화장대는 곳곳의 포마이카 칠이 벗겨져 있었지만 깨끗한 거울에 비치는 엄마의 얼굴은 맑았다. 실로 오랜만의 친정길이었을 것이다. 화장품이라고 해봤자 본래 이름으로 부르기도 민망한 샘플 로션 몇 개와 자주 바르지 않아 오래된 립스틱이 전부. 세 아이를 키우며 남편을 도와 가내수공업장 살림꾼의 인생을 살던 엄마는 그것으로 꼼꼼하게 얼굴 곳곳에 자생하는 근심과 고단함을 가렸다. 화장대 거울 속 엄마의 빨간 입술과 윤이나는 피부가 참 고왔다. 84년 5월. 빛고을이 고향인 엄마는 커다란 보따리 2개와 막내의 고사리손을 꼭 품고 서울역에서 광주행 무궁화호에 설렘을 실었다.
광주역에 도착한 시간은 자정에 가까웠다. 열차에서 내린 사람들은 서둘러 자기 갈길을 갔다. 대통령 각하께서 야간통금을 해제한 지 몇 년이 지난 후였지만 광주의 암묵적 야간 통금은 아직 해제되지 않은 듯 고요했다. 엄마는 나를 업고 손에는 짐을 챙겨 바삐 걷다 잠이 덜 깨 흔들리는 내 엉덩이를 두드리며 길을 재촉했다. 엄마는 꽤 오랜 시간 동안 잠든 나를 업고 인적 없는 정류장에 서서 택시를 기다렸다. 역에서 이모집까지의 거리는 멀지 않으나 늦은 밤 그 시국에 걷기에는 위험했고 택시 말고는 그 시간에 갈 수 있는 교통편이 없었다. 친정 가는 길은 고되고 멀었다.
눈을 떴을 때는 하얀 소파 천이 깔끔하게 깔린 택시 안 뒷자리 엄마의 무릎 위였다. 택시는 짧은 거리를 부드럽고 단정하게 달려 전남대 옆 이모집에 우리를 내려놓았다. 용봉천변에 옹기종기 봄꽃처럼 피어있던 흰 오리들이 갑작스레 등장한 택시 소리에 꽥꽥거렸다. 막내 여동생을 기다리던 이모가 오리 울음을 듣고 밖으로 나와 우리를 반겨 안았다. 이모의 진하고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에는 울음과 웃음이 반반쯤 섞여 있었다. 자매는 한참을 그 자리에 부둥켜안았다. 나는 둘 사이를 빠져나와 용봉천 오리들과 대문 앞 자매를 구경했다. 엷은 달빛에 비친 이모와 엄마는 막 벌어지려고 하는 목련 봉우리 같았다. 용봉천 오리들은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다음날 우리는 이모 가게에서 팔 김을 양념했다. 이모가 숟가락 뒤에 들기름을 묻혀 김에 서걱하게 바르고 그 위에 굵은소금을 아무렇게나 뿌리면 엄마는 그 김을 곤로 위 석쇠에 한 장씩 구워내고 내 앞에 놓았다. 나는 그 김을 삐뚤어지지 않게 위로 쌓았다. 자매는 김을 구우며 그간 각자 인생의 이야기를 말하고 들었다. 그녀들의 결혼생활은 대부분 노곤했을 테지만 서로에게 전해지면서 꽃이 되었다. 이야기꽃은 내 앞의 김처럼 자매 앞에 쌓였다. 이야기에 취해 호방하게 웃던 이모가 들기름을 묻히다 김을 찢어먹으면 그 김은 내 입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그 김을 더 정성스레 구웠고 이모는 찢어진 김에 더 꼼꼼하게 기름을 발랐다. 밥이 없어도 김은 참 맛있었다.
꽃 같은 자매의 이야기도 질 무렵엔 슬펐다. 서로의 사는 이야기는 이모가 겪은 80년 5월의 분노를 쏟아내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용봉천 앞에서 도살을 앞둔 개보다 못하게 끌려가던 대학생들을 목격한 이야기, 그들을 공수부대에서 총살했다는 이야기, 총알이 방 유리를 뚫고 들어와 온 식구들이 집에서 가장 두꺼운 벽체 아래 모여 벌벌 떨던 이야기, 광기가 도시를 훑고 지나간 후 진압군들이 전남도청 광장에 사람들 사지를 찢어서 빨랫줄에 하나씩 걸어놨더라는 루머. 귓바퀴를 돌아 들어가는 80년 5월 이야기는 다른 나라의 이야기 같았다.
이모부가 용봉천 아래서 키우던 오리들에게 밥을 주다 공수부대원들에게 맞으며 붙들려가던 이야기를 할 때 이모는 얼굴의 근육을 있는 데로 찌푸리고는 가슴을 주먹으로 치며 울었다. 이모는 이모부가 끌려갈 때 오열하며 공수부대원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려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그 덕인지 이모부는 개머리판과 군홧발로 흠씬 두들겨 맞았지만 다행히 끌려가지 않았다. 지아비를 살리겠다고 악다구니를 쓰며 달려드는 여인이 귀찮았던 것일까. 아니면 천변에서 구멍가게를 하며 오리를 치던 평범한 40대 소시민 가장을 때리고 끌고 가던 자신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을 가졌던 것일까. 이모 식구들은 그날 이후 며칠을 벽이 두꺼운 방에 모여 숨죽이며 지냈다. 난리가 끝난 후 내려가 본 용봉천에는 이모부의 오리들이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공수부대원들은 이모부 대신 오리들을 잡아갔다. 엄마는 그래도 그날 그중에 착한 공수부대원이 있어서 형부가 무사한 것이라고 농을 쳤다. 이모는 호방하게 웃었다.
이모부가 천변에서 키우는 오리를 잡아왔다. 공수부대가 다 잡아갔던 오리는 몇 년이 지나 어느새 다시 많아졌다. 이모부는 그날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다가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부터 다시 용봉천변에서 오리를 키웠다. 이모는 이모부가 잡아온 오리에 토란대와 된장을 넣고 고춧가루로 양념해 빨갛게 탕을 끓였다. 엄마는 이모의 구멍가게 안 한켠 평상에 밥상을 차렸다. 이모와 이모부, 엄마와 나는 좁은 평상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대충 구운 것 같은 김을 하얀 밥에 싸서 오리탕 국물과 먹는 밥맛은 꿀맛이었다. 밥 먹는 와중에 사람들이 간간이 들어와 이모와 엄마가 구운 김을 사 갔다. 때론 돈을 내지 않고 공책에 이름과 금액을 적고 가져갔다. 어떤 사람들은 양초와 향, 조화 같은 것들을 사 갔다. 김을 사가는 사람들보다 많았다. 그들도 돈을 내지 않으면 공책에 이름과 금액을 적고 갔다. 사람들이 사간 혹은 가져간 이모 구멍가게의 김과 양초와 향과 꽃은 80년 5월 그날 하늘로 먼저 간 영혼들을 달래주는데 쓰였다.
서울로 올라가는 날 이모집 앞은 시끌벅적했다. 구멍가게로 들어온 대학생들은 하나같이 표정이 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그들은 이것저것 산 뒤 여러 명이 한 번에 모여 어디론가 이동했다. 어제처럼 어떤 학생들은 돈을 내고 어떤 학생들은 공책에 이름과 금액을 적었다.
광주역으로 가는 우리에게 이모는 집에 가서 먹으라고 오리와 토란대를 싸 주었다. 전남대 앞 길 곳곳에는 '살인마 전두환' '5월의 영령이여'같은 현수막이 붙어 있었고 한때의 사람들은 울부짖으며 행진했다. 이모부는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오토바이로 우리를 역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날 광주는 다른 나라 같았다.
기차가 5시간여를 달려 올라간 서울은 광주와 달리 평온했다. 집에 가는 길의 공기는 여름처럼 뜨거웠다. 엄마는 이모가 준 재료로 오리탕을 끓여냈다. 하지만 서울의 공기로 끓인 오리탕은 광주에서 먹던 맛이 나지 않았다. 엄마가 구워낸 김도 이모의 구멍가게 김 맛이 아니었다. 350여 km 남짓의 시공간 차이는 매우 컸다.
이모는 구멍가게는 오래가지 못했다. 아마 외상을 너무 많이 준 탓일 것이다. 이모부의 오리 사육도 몇 년 후 용봉천의 복개로 끝이 났다. 강산이 4번가량 바뀌는 사이 이모부와 이모 그리고 엄마는 차례로 하늘의 부름을 받고 귀천했다. 대신 나는 목련 같던 자매의 모습과 구운 김과 오리탕, 그리고 그날 처음 알게 된 이모와 이모부의 80년 05월을 기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