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라기 지구. 외계생명들이 아기공룡 한 마리를 UFO로 납치했다. 그들은 그 갓난아이를 이리저리 살펴보고는 머릿속에 초능력 장치를 심어 곧 다가올 빙하기에도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을 남겼다. 그것은 고등생명체의 선지자적 배려였지만 윤리적 측면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그 공룡은 부모로부터 떨어져 자연의 순리대로 살 수 있는 기회를 놓쳤고 빙하기에도 살아남아 시공을 초월해 1억 년 동안이나 얼음 속에 묻혀있다가 1987년 대한민국 서울 한강에 나타났다. 그 아기공룡의 이름은 둘리다.
둘리는 우여곡절 끝에 서울시 쌍문동 2-2번지 마음씨 좋은 고길동 아저씨 집에서 정착했다. 어느 평온한 날 배가 부르도록 밥을 먹은 둘리는 낮잠을 청했고 꿈을 꿨다.
꿈속에서 둘리는 행복했다. 따뜻하고 모든 것이 풍족한 중생대 지구 어느 곳에서 엄마 아빠의 사랑을 받는 귀여운 아기공룡이었다. 외계인이 둘리를 잡아가기 전까지는 말이다. 엄마와 함께 있던 둘리를 그들은 UFO를 이용해 손쉽게 납치했다. 먹이를 찾느라 근방에 있던 아빠는 속수무책이었다. 둘리는 잡혀가면서 엄마를 외치다가 곧 꿈에서 깨어났다.
꿈에서 깬 둘리는 문득창밖을 봤다.어느덧 밤이 되어 어두웠지만머릿속에는 꿈에서 본 엄마의 얼굴이 생생했다. 검게 아무것도 없던 하늘은 하나 둘 반짝이는 별빛으로 가득 찼고 그것들은 이내 그리운 엄마의 얼굴로 변했다.
둘리는 나지막이 엄마를 불렀다.
“엄마... 엄마...”
둘리의 커다란 두 눈으로부터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알쏭아. 이제 우리 그만 자야겠다.”
“싫어. 더 볼래.”
“아냐. 둘리 이거까지만 보고 주말에 보자. 원래 평일엔 만화 보는 거 아니잖아.”
“응... 알겠어. 근데 주말에 우리 이거 다시 보자.”
꼭 이어 보겠다는 결연한 아이의 의지. 손도장을 찍으며 약속을 하고 아이 스스로 TV를 끄게 한 후 잠자리를 만들었다. 벽시계는 저녁 9시 40분을 가리켰다. 만화 보는 것을 싫어하는 안주인님 하고 30분 전 “오늘만이다. 딱 한편만.”이라고 약속한 시간이기도 했다.
“나 화장실 다녀오면서 엄마 보고 올래... 엄마~”
아이는 잠자리를 스르륵 빠져나가 화장실로 갔다. 자기 전 버릇과 같이 소변도 보고 방금 본 둘리의 여운이 남았는지 괜히 엄마도 보러 간다고 한다. 화장실에는 안주인님이 아직 샤워를 하고 있었다. 굳이 노크를 해 잠긴 문을 열게 한 후 엄마를 먼저 보고 한번 안아준 후 소변을 보고 다시 잠자리로 와 내 옆에 누웠다.
아이의 두 눈이 붉었다.
“알쏭아 슬퍼?”
“응 슬퍼.”
“뭐가 슬퍼?”
“‘엄마~엄마~’ 하는 게 슬퍼."
“왜? 둘리 엄마가 없어서?”
아이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이불속으로 감정과 함께 숨었다. 나는 아이를 살짝 안았다. 아이의 오물거리는 턱 근육과 더워지는 머리가 가슴으로 느껴졌다. 작은 머릿속에는 얼마 안 되는 경험을 재료로 빚은 무한한 상상이 감정을 타고 넘실거렸을 터. 아이는 무엇을 떠올리고 생각했을까.
얼마 후 엄마가 샤워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오며 밝게 아이를 불렀다.
“알쏭아~”
아이는 잠시 얼굴을 꺼내어 엄마를 보고는 다시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들키지 않으려 애썼지만 이불속에서 아이는 울고 있었다. 코끝은 이미 빨개졌고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엄마의 손에 아이의 슬픈 눈물이 함께 묻어 나왔다.
나는 안주인님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줬다. 달리 할 수 있는 게 있을까. 안주인님은 그냥 아이를 꼭 안아줬다.
아이가 우는 이유는 참 다양하다. 아파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마음이 안 들어서 울고 매워서 울고 배고파서 울고 졸려서 울고 덥고 추워서 운다. 운다는 것은 아이가 하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의 표현이다. 이번에는 무엇이 그의 마음속 눈물샘을 건드렸을까. 둘리가 엄마를 외치며 슬퍼하는 모습은 아이의 어떤 감정을 변주했을까.
부모가 자식을 사유하는 방법이 늘 그러하듯 안주인님과 나는 이 일을 두고누구를 닮았냐 안 닮았냐에 관하여 작은 논쟁을 폈다. 그리고 그것은 가족 단톡 방으로 옮겨졌다. 그곳에서는 여러 기억들이 소환됐다. 그리고 이어진 누나의 증언으로 어린 시절 내 기억의 단편을 찾았다.
내가 내 아이의 나이 때 나의 엄마는 잠들기 전 자장가로 이런저런 노래를 불러주셨다. 내 나이 다섯 살 어느 저녁이었다. 그날도 다복하게 식구들이 한방에 일렬로 누워 잠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엄마가 이런 노래를 불러줬다.
엄마가 섬 그늘에 굴 따러 가면
아기는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노래에
팔 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다섯 살 아이의 감정선을 움직이는 가사와 멜로디. 나는 그 노래를 들으며 (나는 이렇게 가족이 있는데) 아기가 외롭게 혼자 팔 베고 잠이 드는 것이 몹시 불쌍했고 (나는 엄마가 있는데) 섬집아기에게 엄마가 영영 안 돌아오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였다.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는 특유의 노래 멜로디 역시 내 감정을 변주하며 눈물샘을 건드렸다.
“엄마 부르지 마부르지 마. 엉엉.”
가사가 이어질수록 슬픔은 커졌고 나는 결국 이불 섶에 얼굴을 묻으며 울었다. 누나랑 형은 울보라고 나를 놀렸다. 엄마는 왜 이렇게 슬픈 노래를 불러주는 것일까. 나는 이불 섶에서 엄마 품속으로 얼굴을 옮겼고 엄마는 나를 꼭 안아줬다. 엄마품에서 감정을 진정시키며 나는 마음속으로 '엄마. 없어지면 안 돼요. 섬집아기처럼 나를 두고 어디 가면 안 돼요.'를 되뇌었다.
그로부터 37년이 지난 지금 내 나이는 42살. 42살의 감정으로 5살 아이의 것과 지금의 나보다 5살이 어린 엄마의 감정을 생각해 본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깊던 나의 엄마는 이 노래를 불러 주면서 내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 우는 나를 품에 안으면서 어떤 생각을무슨 말을 하셨을까. 시간이 선택적으로 기억을 재생한 탓에 엄마가 뭐라고 하셨는지 아쉽게 기억나지 않지만 엷게 웃으며 '괜찮아 나야 강아지~' 하며 안아주던 엄마의 폭신한 품은 가물하게 떠오른다.
아기공룡 둘리를 보며 아이가 울었을 때 나는 이불속에 숨어있던 아이를 살며시 꺼내 꼭 안아주며 이런 말을 해 줬다.
“알쏭아, 아빠의 엄마는 하늘나라에 계시잖아. 아빠의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잘 지켜주고 계신 것처럼 둘리도 둘리의 엄마가 하늘나라에서 둘리를 잘 지켜주실 거야."
더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그 단어들이 입에서 떨어지지 않아서 하지 못했다. '영원' '언제나'같은 단어 들인데 그것들이 들어가면 거짓말이 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37년 전에는 엄마와 함께 있는 시간들은 영원히 계속될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모든 살아있는 것이 영원하지 않듯 나의 엄마도 십수 년 전 먼저 둘리가 올려다본 하늘로 돌아가 별이 되었다.
하지만 아직 남아있는 것은 나의 엄마가 5살의 나에게 불러주었던 자장가와 그것을 들으며 느꼈던 감정이다. 내 아이도 오늘 느낀 감정의 변주를 꼭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게 바람이다.
아이에게 더 해주고 싶었던 말은 다음과 같다.
"그리고 아빠 엄마는 항상 알쏭이 옆에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리고 언제나 슬프지 않게 해 줄게.”